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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기대를 하지도 않았지만 숙소에서 제공해 준 아침은 식빵과 커피, 그리고 몽키 바나나뿐이었다. 하지만 원래부터 아침은 대충 먹는 경우가 많았고, 당장은 배고프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런 조촐한 아침이라도 괜찮았다. 그렇게 간단하게나마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브로모 화산에서 뒤늦게 오거나 이제 막 씻고 식당으로 들어온 여행자들이 보였다.

이럴수가. 벌써 샤워를 했단 말이야? 새벽과 아침에 걸쳐 산을 두 번이나 올랐기 때문에 온몸은 흙먼지로 뒤집어 쓴 상태라 무지하게 찝찝하긴 했다. 그런데 우리가 있었던 곳은 공용 화장실이라 내 순서가 오려면 한참 뒤에나 가능해 보였다. 일단 숙소 뒤로 가서 신발과 옷을 털기로 했다. 살짝 털어봤는데 시커먼 먼지가 가득 나왔다.


숙소 뒤편에는 공간이 거의 없었지만 좀 높은 지대라 이 근처 마을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여기에 도착했을 때는 한밤중이라 이제서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주변을 살펴 보니 브로모 화산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지붕이나 땅이 전부 회색빛이 감도는 우중충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불어오는 바람도 차가워서 유난히 생기가 없어 보였다. 브로모 화산을 오를 때는 역시 산을 오르기 때문에 더웠던 것인가?


결국 씻지도 못하고 이젠 화산으로 떠나게 되었다. 우리가 족자카르타에서 예약했던 투어는 2박 3일 일정으로 브로모 화산과 이젠 화산을 둘러 보고, 발리로 이동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막 하루가 지났기 때문에 이번에는 새로운 화산으로 떠나는 것이다. 물론 1박 2일짜리 투어를 예약했던 여행자는 곧바로 발리로 이동한다.


밴인지 작은 버스인지 모를 차량 위에 여행자들의 배낭을 가득 싣고 브로모 화산을 내려갔다. 서양 여행자를 가득 태우고는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역시 2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우리를 내려다 준 곳은 지난 밤에 도착했던 프로볼링고 여행사 사무실 앞이었다. 이들의 말로는 여기에서 이젠 화산으로 가는 팀과 발리로 가는 팀이 각각 다른 차량을 타고 이동한다고 했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도착할 줄 알았던 교통편은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우리는 한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바닥에는 그들이 내려 놓은 배낭이 아무렇게나 깔려 있었다. 순간 내 배낭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내 다른 배낭의 틈바구니에서 찾을 수 있었다. 다른 배낭과 함께 바닥에 세워 놓은 뒤 주변을 살펴봤다. 내 뒤에는 여행사와 작은 상점이 있었고, 바로 앞에는 도로였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뒤에 있었던 상점에서 물 한병을 산 뒤 마시고 있는데 키라가 다가왔다. 키라는 전날 밤에 브로모 화산을 올라가던 차량에서 만났던 여자다. 컴컴한 차 안에서 이야기를 해서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한국에서도 지냈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확실히 기억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때 "내 이름은 키라야. 칙칙~ 에프킬라 알지? 그걸 생각하면 돼." 라는 말을 해서 잊어 버릴 수도 없었다.

호주인이었던 키라는 한국,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꽤 오래 지내서 그런지 아시아의 문화나 언어에 대해서도 익숙했다. 한국말은 조금 기억하기만 했고, 대신 인도네시아어는 할 줄 알았다. 정식 학교인지는 모르겠으나 인도네시아에서 교사로 지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젠 화산으로 가는 차량을 기다리는 동안 키라와 한국 음식, 인도네시아 여행 그리고 내가 호주에도 있었기 때문에 호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여행지에서 다른 여행자와 만나고, 대화를 하는 것은 언제든지 즐겁기 마련이다. 우리는 한참 수다를 떨다가 같이 사진을 찍은 후 페이스북 친구를 맺자며 이메일을 교환했다.


키라는 이 많은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원래부터 알던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혼자 여행을 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 이젠 화산을 거쳐 발리까지 이동하는 똑같은 일정이었다.


그나저나 언제 출발하지? 1시간도 넘게 기다렸지만 이젠 화산으로 가는 차는 도착하지 않았다. 먼저 발리로 이동하는 버스가 도착해서 사람들을 태운 후  그로부터 한참을 기다린 끝에 작은 승합차에 탈 수 있었다. 이젠 화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타는 밴은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에어컨은 거의 안 나오는 것은 그렇다 해도 보조 좌석이 부서진 것이었다. 그냥 가도 불편할텐데 보조 좌석에 앉은 친구는 모르긴 몰라도 무지하게 힘들었을 거다. 일단 그렇게 이젠 화산을 향해 달렸다.


2시간 정도 달린 후 어느 식당에 도착했다. 너무 배고팠는데 적당한 시간에 점심을 먹을 식당에 도착한 것이다. 이번에는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겠다며 치킨 커리를 주문했는데 꽤 맛있었다. 평소에 먹는 커리보다 훨씬 달달한 맛이 느껴졌다. 가격은 2만 루피아로 싼 것도 그렇다고 비싼 것도 아니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함께 마신 콜라는 5천 루피아였다.


우리는 다시 또 달리고, 달렸다. 그냥 앉아 있었지만 정말 힘들었다. 전날도 하루 종일 이동했는데 또 하루를 이동하는데 보낼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졸다가 깨어난 후로는 이어폰을 꼽고 계속 창밖을 봤다. 푸른 들판을 빠르게 지나치고, 간간히 마을과 사람들이 보였다. 노란빛이 감도는 들판도 보였다. 계속해서 이국적인 풍경이 지나칠 때마다 나는 온몸으로 즐겼다. 들려오는 어느 인디밴드의 음악 소리와 지금 멍하니 창밖을 내다 보는 이 상황이 너무 잘 어울렸다. 난 이 당시를 음악과 풍경이 잘 섞인다는 표현을 썼다.

어느덧 저녁이 되었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포장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심하게 덜컹거렸고, 모든 사람은 좌우로 쉴새없이 흔들렸다. 브로모 화산이 깊은 산속이고, 오지라는 생각은 이젠 화산으로 향하면서 없어졌다. 여기는 정말 불빛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을 뿐만 아니라 차가 제대로 다닐 수도 없는 길이었던 것이다. 어찌나 험하던지 차가 바닥에 긁히기도 하고, 아주 느리게 달려도 헛바퀴 구르는 것도 자주 있었다. 정말 오지 중에 오지였다.

저녁 6시 반쯤 숙소에 도착했다. 이동하느라 힘들긴 했지만 그나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일단 짐부터 풀고, 밥을 먹기로 했다.


배정 받은 방을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시설이 괜찮았다. 화장실도 안에 딸려 있었고, 추운 날씨라 당연하긴 했지만 뜨거운 물도 잘 나왔다.


짐만 대충 풀어 놓은 채 밖으로 나가 밥을 먹고,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는 커피와 차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지만 밥을 먹기 전에 한잔만 마셨고, 그 이후에는 맥주를 마셨다. 맥주가 조금 비싼 감이 있었지만 항상 여행의 마무리는 맥주였기 때문에 없으면 또 아쉽다.


여기에서 팔고 있었던 신기한 물건이 있었는데 일명 고양이똥 커피였다.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는 동안에도 몰랐는데 족자카르타에서 만난 동생이 이 커피에 대해 꼭 마셔야 한다며 극찬을 해서 알게 되었다. 고양이과 동물이 커피콩을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은 채 나오는데 이것으로 커피를 만든 게 바로 이 루왁이다. 뭐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한국에서는 무지하게 비쌀뿐만 아니라 구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커피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루왁 커피를 살 계획도 없었는데 갑자기 관심이 생겨 구입하기로 마음 먹었다. 여기가 루왁 커피 산지라서 다른 곳보다 더 싸다는 말도 좀 솔깃했고, 선물로도 딱이었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현금이 얼마 없어 몇 개 구입하지는 못했는데 정작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셔보지도 사진으로 찍지도 않은 채 사람들에게 나눠줘버렸다.

아무튼 우리는 피곤했던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음날 또 화산을 올라가기 때문에 일찍 잠이 들었다. 아침에 숙소에 있던 모든 여행자를 깨워줬지만 우리만 깨워주지 않아 늦잠을 자긴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