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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에서는 특별한 계획이 없었다. 발리가 해변만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딜 보러 가고 싶단 생각도 없었고, 무얼 꼭 해야겠다는 그런 의무감조차 없었다. 그저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하루 종일 쉬고 싶을 뿐이었다. 항상 여행을 하면 아무리 피곤해도 하나라도 더 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는데 마냥 쉬겠다니 이것도 좀 이상했다.

사실 발리에서만큼은 쉬는 여행을 하자는 게 나의 생각이었지만 브로모 화산과 이젠 화산을 지나는 일정이 힘들었던 것도 있고, 화산을 오르면서 다리의 통증이 더 심해져서 걷기가 무척 힘들었다. 쿠타에서는 동네만 천천히 돌아보고, 만약 시간만 허락이 된다면 다음날 가까운 우붓이나 다녀오자고 마음 먹었다.

아침에 게스트하우스에서 제공해 준 빵과 커피를 마시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날은 족자카르타부터 함께 여행을 한 동생이 출국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공항 근처까지라도 바래다 줘야겠다며 거리로 나섰다.


발리에서 제대로 해변에서 즐기지 못하고 떠나는 게 아쉬워 쿠타 비치를 잠깐 구경한 뒤 공항을 향해 걸었다. 확실히 발리는 기존에 내가 봤던 인도네시아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아무래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라 쇼핑할 수 있는 곳이 많이 있었고, 패스트푸드점을 발견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늦은 밤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상업화된 거리를 걷다가 디스커버리 쇼핑센터 앞에서 배웅을 마무리했다. 당시 공항까지는 얼마나 먼지 알지 못해서 4만 루피아에 적정 가격으로 타협을 하고 보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공항까지는 무척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도 이 금액이 아주 크게 손해봤다고 보기는 어려운 게 여기에서 곧바로 어느 한 외국인을 만났는데 이 친구는 공항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무려 10만 루피아를 넘게 줬다고 했다. 너무 비싸게 준 것이 아니냐고 물으니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멋쩍어 했다.


우리는 다시 뽀삐스 거리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화려하지는 않았던 뽀삐스 거리 1이었는데 이는 낮이나 밤이나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으로는 르기안 거리가 가장 화려했고, 뽀삐스 거리 2도 뽀삐스 거리 1보다 사람들이 많고, 상점도 더 많았던 것 같다.

숙소로 돌아온 후에는 뭘 할까 고민하다가 그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인터넷을 하러 가기로 했다. 뽀삐스 거리는 여행자 거리답게 인터넷 카페가 많았지만 꼭 그곳이 아니더라도 WIFI가 되는 패스트푸드점도 인터넷을 쓸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휴대폰이 있으니 KFC에 가서 작은 햄버거 하나만 주문하고선 2층으로 올라가 인터넷을 마음껏 이용했다.

이날 하루에 두 번 KFC에 갔는데 오전에는 페이스북에서 키라가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고 남긴 글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근데 내가 댓글을 달았을 때는 응답이 없더니 오후에 해변에서 몸을 담그고 숙소로 돌아가는 때 뽀삐스 거리 1에서 키라를 만나게 되었다. 혹시나 싶어 우붓에 같이 갈 생각이 없냐고 물어 봤는데 그저 이들은 오늘도 쉬고, 내일도 쉬겠다고 했다.


숙소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 후 비치타올과 카메라를 챙겨 들고 다시 해변으로 나갔는데 도중에 키라를 또 만나게 되었다. 나는 키라에게 호주 국기가 그려진 비치타올을 펼쳐 보이며 "오스트레일리아!"라고 말을 했는데 갑자기 지나가던 차량 안에서 어떤 여자가 환호성을 질렀다.

"아마 저 친구도 호주 사람인가봐!" 키라가 웃으면서 말했다.


발리의 다른 해변을 가보지 않아서 어떤지 모르겠지만 일단 쿠타 비치는 그리 깨끗한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자 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쉽게 바다를 보러 갈 수 있고, 적당한 파도가 있어 서핑보드를 즐기기에도 매력적이었다. 이곳에서는 서핑보드를 빌려서 즐기거나 강사로부터 배울 수도 있다.


해변가에서 덩달아 신나 뛰어 노는 강아지의 모습이 우스광스러웠다.

 
많은 배낭여행자들이 인도네시아 곳곳을 여행하다 발리로 들어와 며칠간 푹 쉬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지 어느 해변보다 자유롭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많이 느껴졌다.

카메라를 들고 있어 다시 바다에 들어 가지는 않았지만 그런 분위기에 흠뻑 취해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어느 한 아저씨와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인도네시아 사람이었다. 수라바야쪽에서 왔다고 했는데 어떤 관계인지는 모를 인도네시아 여자 두 명을 소개시켜줬다.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살짝 능글맞게 아가씨에게 관심이 있냐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우연히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어봤다. 그녀들은 아주 흔쾌히 포즈를 취해줬다.


지명 그대로 서퍼들의 천국이라 불렸던 호주 서퍼스파라다이스에서도 이렇게 많은 서퍼를 보지 못했다. 서핑보드가 나에겐 아주 생소했지만 여기에서만큼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그런 흔한 레포츠였다.


부서지는 하얀 파도와 함께 멋지게 들어오는 서퍼들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난 원래 서핑보드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막상 쿠타 비치에 오니 한번쯤은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다만 몸도 피곤하고, 다리도 다친 상태라 그냥 멀리서 구경하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했다.


꼭 서핑보드를 타지 않더라도 따뜻한 해변에 오면 즐겁기 마련이다. 아이들은 흙이 묻고, 물에 젖어도 아무데서 눕기도 하고, 어느 여행자는 모래사장에 누워 책을 읽는 것으로 휴가를 만끽한다. 서핑을 즐기는 사람에게도 발리는 천국이지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쉬기에도 천국과 같다. 물론 진득하게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여행자가 많은 곳도 발리다.


그녀의 앞모습과 그의 뒷모습이 유난히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저 모래사장에 앉아 사람 구경, 바다 구경을 했다. 아마 다른 때라면 출국이 얼마 안 남았다며 조금이라도 더 돌아 볼텐데 말이다. 참 여유롭게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덧 해는 황금빛을 뿌리며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