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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할 일이 없던 까닭에 무작정 방콕의 중심가라 할 수 있는 시암으로 향했다. 카오산로드에서 시암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많았지만 일부러 수상버스를 타고 사판탁신 선착장(Saphan Taksin)으로 간 후 스카이트레인(BTS)를 타고 가기로 했다. 가까운 길을 놔두고 멀리 돌아가는 셈이다. 오랜만에 방콕의 젖줄 짜오프라야강을 따라 짧은 항해를 시작한다.


카오산로드에서 가장 가까운 선착장인 파아팃(Phra Ahthit)으로 가서 수상버스를 기다렸다. 파아팃에는 주황색과 파랑색 깃발이 꽂혀 있는데 이는 주황색과 파랑색 깃발이 있는 수상버스를 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데 주황색을 타야 하는데 가장 비싼 관광객을 위한 보트를 타고 말았다. 주황색이 너무 안 와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냥 엉겁결에 타버린 거다. 너무 오랜만에 타서 그런가. 예전 같았으면 무려 40밧짜리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아까워 죽겠다고 궁시렁거릴 테지만, 이번에는 무조건 아끼면서 다닐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사판탁신까지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다며 나쁘지 않은 나의 선택에 만족했다.


파랑색 수상버스는 관광객을 위한 대중교통이라 딱 파아팃에서 사판탁신까지만 운행한다. 중간에 내릴 수 있는 곳도 왓포라든가 차이나타운인 관광지만 거쳐 간다. 그리고 영어로 끊임없이 설명을 해준다는 게 특징이다. 그게 꼭 장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흙색 빛이 감도는 짜오프라야강을 바라보는 건 언제나 좋다. 이건 태국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이국적인 풍경이기도 하다. 강을 따라 형성된 가옥이나 유적을 구경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판탁신에 가까워질수록 높게 솟아오른 마천루가 등장한다. 수상버스를 타고 내려오면서 다양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몇 년 전에 입장료까지 내고 들어갔다가 비가 와서 구경도 못했던 왓아룬은 항상 짜오프라야강에서 재회한다. 언제쯤 나는 제대로 된 방콕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왕궁은커녕 왓아룬도 못 봤는데, 이거 생각해보니 태국에 대해 아는 건 대체 뭔지 모르겠다.


건물이 점점 높아져 간다. 여기서부터는 유명 호텔이 자리를 잡고 있어 나도 여행자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여행자를 구경하게 된다.

파랑색 수상버스의 종점인 사판탁신에 도착했다. 스카이트레인을 타기 위해 역으로 가는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출구가 있다. 내 기억으로는 좀 더 걸어갔던 것 같은데 아마 최근에 선착장 부근으로 출구가 생긴 모양이다.


일회용 교통카드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동전부터 찾아야 한다. 간혹 큰 역에는 지폐 투입구도 있는 자동발급기가 있는데 사판탁신에서는 내가 못 찾은 것인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동전이 없으면 창구로 가서 교환하면 되긴 하지만 항상 이 부근에서는 동전을 찾느라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시암까지는 34밧이다. 최신 교통수단답게 버스보다는 훨씬 비싸다.


타는 방법은 카드를 넣고 통과한 뒤 나오는 카드를 다시 집으면 된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는 카드를 넣으면 다시 나오지 않는 방식으로 회수한다.


난 이렇게 스카이트레인을 타고 시암을 갔던 적이 몇 번 있다. 하루 정도 방콕을 돌아보는 여행자라면 여러 교통수단을 이용해 볼 수 있기에 나쁘지 않은 루트다. 정말 할 게 너무 없어서 카오산로드에서 시암까지 걸어서 갔던 적도 있지만 그땐 더위에 살짝 미칠 뻔했으니 걷는 건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익숙한 시암. 그리고 시암 파라곤 주변. 별로 변한 건 없다. 백화점이 많아서 쇼핑을 하는 사람에겐 재미있을지 몰라도 아무런 목적이 없는 사람에겐 다리 아픈 동네다. 이상하게 동네를 걸어 다닐 때보다 백화점을 걸을 때 피로가 빨리 몰려온다.


그럼에도 더위를 피하려, 아니 시간을 때우러 백화점 구경에 나섰다. 더운 나라엔 어울리지 않은 두꺼운 옷도 보고, 최신 가전제품을 만져봤다.


거리로 나와 맞은편에 있던 MBK도 들어가 구경했다. 여기도 엄청 갔던 곳인데 지금까지 이름도 몰랐다. 이번에는 MBK라고 확실히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MBK는 우리나라 동대문 느낌이 나는 상가인데 맞은편에 있는 백화점과는 다르게 싸구려 분위기로 가득하다. 실제로 여기는 여러 짝퉁을 파는 곳으로 유명하다. 딱 봐도 허접해서 구매력은 떨어질 수 있지만 일반 시장처럼 흥정도 가능하다. 근데 여기 언제부터 내부 사진을 찍지 못했나. 특히 짝퉁 제품이 많은 곳은 아예 촬영금지 팻말이 붙어있다.

백화점을 너무 열심히 돌아다녔나. 피로가 몰려왔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음료수를 마신 후 여전히 뜨거웠던 시암의 거리를 걸었다.


더위를 피해 낮잠을 자는 뚝뚝 아저씨를 보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고 할까. 역시 태국답다. 지금까지만 놓고 보면, 몇 년 전과 여행 패턴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완전히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태국은 여전히 좋다. 태국에 오면 낮잠을 자는 저 아저씨를 언제든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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