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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간의 말라위 여행을 마치고 잠비아로 향했다.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Lusaka)로 가는 버스는 아침 6시에 있어 새벽부터 일어나 구도심으로 가서 버스를 탔다. 여전히 몸은 안 좋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13시간 이동하는 동안 버스에서 10시간 정도를 잠에 취했다.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저녁에 루사카에 도착했을 때 몸 상태를 봐서 택시를 타도 됐는데 나는 또 미련하게 배낭을 메고 걷기 시작했다. 초행길인데다가 거리가 어둡고, 생각보다 숙소가 멀어 한참을 걸어야 했다. 숙소에 도착해 체크인을 한 후 바로 누워 잠이 들었다. 그렇게 많이 잤는데도.

 

다행히 숙소 근처에는 괜찮은 병원이 있어 다음날 아침 곧장 병원으로 갔다. 기다리는 시간마저 고통스러웠다. 검사를 해보니 예상대로 말라리아였다. 말로만 듣던 말라리아라니. 주사를 맞고 처방약을 받은 뒤 숙소로 돌아와 다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몸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계속해서 잠에 취해 쓰러져 있기만 했고 그로 인해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다. 분명 누군가 자신의 집으로 가서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을 했는데 그건 꿈이었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2달 동안 배낭에 넣어둔 라면을 꺼냈다. 따끈한 라면에 밥 말아 먹으면 괜찮을까 싶었는데 라면을 끓이는 동안 몸이 너무 아파 일어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힘들게 끓인 라면을 두 젓가락 겨우 먹고 모두 버렸다.

 

루사카에 먼저 도착한 독일인 친구 이보가 근처 다른 숙소에서 지내고 있어 그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보가 지내고 있는 호스텔은 불과 100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나는 배낭을 짊어지고 이동할 힘이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났다가 눕기를 반복, 2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배낭을 메고 걷기 시작했다. 호스텔에 도착하자마자 마당에서 인터넷을 하던 이보와 재회하게 되었고 그는 내가 엄청나게 아픈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했다. 리셉션에서 체크인이고 뭐고 일단 침대부터 달라고 하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또 누웠다. 정말 이렇게 아플 줄 몰랐다.

 

당시 내 몸이 어느 정도로 아팠냐 하면 거의 일주일간 먹을 수도, 걸을 수도 없었다. 이보가 사다 준 샌드위치는 겨우 1조각 먹고 더 이상 먹지 못해 곰팡이가 생겨버렸고, 간혹 정신을 차려 일어나면 몇 분도 되지 않아 다시 들어가 누웠다. 눈을 뜬 상태로 누워 있으면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우간다를 여행할 때 말라리아를 앓던 독일인 아저씨를 만났는데 당시 공휴일이었던 1월 1일에 비명을 지르며 나 죽을 것 같으니 당장 앰블런스나 택시를 부르라고 소리를 질렀다. 말라리아를 앓게 되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도 비명을 지르기 직전이었으니까.

 

고마웠던 건 내가 말라리아로 고생하는 동안 이보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내 걱정을 많이 해줬다. 이보는 필요한 것을 계속 사줬고, 눈을 뜰 때마다 제정신이 아니라 얼굴도 기억 안 나는 독일 여자는 나에게 스프를 만들어 줬고, 호스텔 스텝도 수시로 와서 몸 상태를 확인하고 갔다. 정말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온갖 먹고 싶은 게 떠올랐고, 편안한 집이 그리웠다. 그냥 집밥이 생각났다.

 

그렇게 아프고 죽을 것만 같았는데 일주일이 지나자 몸이 조금 괜찮아졌다. 차가운 콜라를 마시거나 동네를 한 바퀴 걸을 수 있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게 가능해지니 신기했다.

 

오랜만에 한식을 먹으면 나아질까 싶어 루사카에 한식당이 있는지 검색해봤다. 하나는 폐업, 다른 하나는 한식이 있다고 하지만 자세한 정보를 얻기 어려웠다. 방법은 하나, 직접 찾아가봤다. 1시간 가량 힘들게 걸어 가보니 그곳은 중국 식당이었다. 그러니까 중국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한식이나 일식도 있었던 거였다. 전혀 식당처럼 보이지도 않아 망설였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돌아갈 수 없어 메뉴판을 달라고 했다. 예상대로 메뉴판에는 제대로 된 한식이 없었다. 오로지 참치김치찌개를 먹고 싶어 왔는데 알 수 없는 음식 중 그나마 한식에 가까운 것을 골라야 했다.

 

웬만해서는 실패할 일이 없는 김치볶음밥을 주문했는데 실패했다. 양배추로 만든 김치는 손톱보다 작아 김치볶음밥을 먹는다는 느낌이 없었고, 중식에서나 쓰는 가루를 넣었는지 강한 향이 올라왔다. 그리고 짰다. 그것도 너무 짰다. 소금을 들이 부었는지 맛은 둘째 치고, 짜서 먹을 수가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고 찾아왔건만 콜라 2병으로 배를 채우고, 김치볶음밥은 반을 남기고 나왔다.

 

몸은 많이 나아졌어도 완전히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루사카에서 며칠 지내는 동안 앞으로 가게 될 나미비아 비자를 먼저 받기로 하고 대사관을 찾아갔다. 나미비아 대사관에서 비자를 신청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한국인 2명이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는데 반응이 시큰둥했다. 그것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그 다음부터 어이가 없었다. 대사관 직원이 당일 비자를 받고 싶다면 150콰차를 달라고 뇌물을 요구했는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줬다. 당연히 불합리한 것에 수긍할 수 없는 나는 돈을 줄 생각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비자는 당일, 그것도 나와 같은 시각에 받았다. 아무튼 몇 시간 동안 서로 말은 안 했지만 비자를 받고 난 후 대사관 앞에서 택시를 같이 타자고 제안했는데 자신들은 지리를 모른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리고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달아나는데 내 입장에서는 참 이해할 수 없는 친구들이었다.

 

수도이긴 했으나 루사카는 여행자들 사이에서 오래 머물러 봐야 하루 이틀이라고 평가되는 심심한 도시다. 그런 루사카에서는 2주간 있었다. 일주일은 말라리아로 고생만 했으니 정상이 아니었고, 그 다음에도 몸을 회복하는 과정이라 딱히 여행이라고 할만큼 돌아다닌 적이 없었다.

 

경로상 짐바브웨는 갈 필요가 없었지만 나는 한 군데라도 더 가고 싶은 마음에 하라레(Harare)로 향하게 됐다. 아침 일찍 버스를 기다리는 도중 나와 이보는 모닝커피가 마시고 싶어 버스터미널 근처를 돌아다니다 보니 작은 매점 옆에 커피를 타주는 곳이 있었다. 밥숟가락으로 설탕을 듬뿍 넣으려는 것을 겨우 말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받았다. 가격은 고작 5콰차(약 500원)으로 며칠 전에 남아프리카지역 프렌차이즈 커피숍에서 마셨던 아이스커피의 1/9 가격이었다.

 

버스터미널의 정겨운 풍경에 신이나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눌렀는데 사람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난 사진을 찍지 말라는 뜻인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사실은 정반대의 반응이었던 거다. 이들은 외국인의 등장에 환하게 웃었고 자신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자며 난리였다.

 

설탕을 조금만 넣어달라고 했는데 커피는 달달했다.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로 가는 버스는 오전 9시 30분과 오후 3시에 있었다. 당연히 우리는 오전 버스를 탔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국경에서 2시간 이상 대기하느라 하라레에는 오후 8시에 도착했다.

 

내가 기억하는 짐바브웨는 한때 물가상승률이 1억%에 달해 빵 하나를 사려고 해도 돈뭉치를 들고 가야 할 정도로 비정상적인 나라였다. 그야말로 최악의 국가. 당연히 짐바브웨에 가면 엄청나게 열악한 환경이나 막장을 볼 수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정반대였다. 루사카에 비해 훨씬 깨끗한 도로, 높은 빌딩이 도심을 채우고 있었다. 때문에 나와 이보는 하라레 거리를 걸으면서 엄청 놀랐다.

 

다만 이 나라는 끝없이 올라가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자국의 화폐 사용을 포기했고, 현재는 미국 달러를 공식 화폐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미국 달러 외에도 남아공 랜드, 보츠와나 풀라, 심지어 일본의 엔이나 중국의 위안까지 비공식 화폐로 사용하고 있다. 어쨌든 현재 미국 달러를 일상 생활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태까지 지나온 나라 중 물가가 가장 비쌌다.

 

하라레에서 4일간 지내는 동안 주로 거리를 걷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짐바브웨 사람들이 워낙 안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걱정을 조금 했는데 생각 외로 괜찮았다.

 

하루는 이보의 친구를 만나(정확히 말하자면 친구의 친구) 하라레 시내를 한 바퀴 걸었다. 이미 걸어본 곳이지만 현지인의 도움으로 구석구석 돌아다니니 모처럼 제대로 여행한 느낌이 들었다.

 

시내에서 조금 특이하게 생긴 건물이 있길래 들어가봤는데 그곳에서 태극기를 보게 되었다. 대한민국 대사관이었다.

 

이날은 셋이서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사실 난 말라리아 이후 맥주를 거의 마시지 않았다. 몸이 괜찮아졌다 해도 술은 받아 들이기 힘들었는지 맥주를 마셔도 맛이 없었다. 어쩌면 잠비아와 짐바브웨 맥주가 맛이 없었는지도. 안타깝게도 그 부분이 더 의심스럽다.

 

토요일 하라레 시내는 한적했다.

 

하라레에는 비싸고 근사한 곳이 가득했지만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풍요롭지 못해 남 이야기일 것 같다. 어느 거리에 가도 물건을 내다 팔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아주 싸구려 불량식품이 많이 보였는데 가령 사탕 하나에 10센트, 20센트에 불과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를 가보고 싶었으나 시간 관계상 곧장 빅토리아 폭포로 이동했다. 빅토리아 폭포까지는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고급 버스 인터케이프를 타고 갔다. 여행자를 위한 버스는 많으나 인터케이프가 가장 유명한 듯 하다. 확실히 이런 버스만 봐도 느껴지지만 남아프리카는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여행하기 훨씬 편했다. 버스는 짐바브웨 제 2의 도시 불라와요(Bulawayo)를 거쳐 빅토리아 폭포 마을로 갔다. 대략 10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빅토리아 폭포 바로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을 이름도 빅토리아 폴스(Victoria Falls)인 이곳은 딱 관광지 그 자체였다. 카페와 식당을 비롯해 기념품 가게가 여행자를 반겼다. 역시 이곳의 물가는 너무 비싸 항상 식당에 가면 가격만 확인하고 나와야 했다.

 

어쩌면 짐바브웨에 온 목적이라 할 수 있는 빅토리아 폭포를 보러 갔다. 입구에서부터 우의를 빌려주는 곳이 눈에 띄었지만 맨몸으로 들어갔다.

 

과연 세계 3대 폭포라는 명성에 걸맞게 빅토리아 폭포는 정말 장관이었다. 우레와 같은 소리, 쉴새 없이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강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이게 끝인가 싶을 정도로 입구 바로 앞에 있는 폭포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거대한 폭포인 만큼 여러 구간을 이동하며 폭포를 볼 수 있다.

 

그래서 폭포를 보는 데만 3시간이 걸린 것 같다.

 

일부 구간의 경우 낙차로 인해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여기서는 아예 폭포가 보이지 않았다. 우의를 입지 않은 나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온몸이 젖었지만 기분은 최고였다.

 

빅토리아 폭포가 끝나는 지점은 잠베지 강을 마주한 두 나라, 짐바브웨와 잠비아의 국경이 있다. 이곳에는 국경을 넘을 수 있는 다리가 있는데 여행자들에게는 번지점프 장소로 더 유명하다.

 

빅토리아 폭포에서 돌아온 후 지도에서 빅 트리(Big Tree)라는 곳을 발견해 무작정 그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원래 이름보다도 ‘품바’가 더 유명한 야생 멧돼지 무리가 호텔 앞에서 정신 없이 풀을 뜯고 있었다.

 

빅 트리는 말 그대로 커다란 바오밥 나무였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그리 크지 않아서인지 살짝 허탈했다.

 

이틀 뒤 국경을 넘어 잠비아로 이동했다. 욕심이랄까. 잠비아에서도 빅토리아 폭포를 보고 싶었다.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비자도 복수로 신청했었으니 다음 목적지가 잠비아였던 건 당연했다. 아무튼 배낭을 메고 걸어서 국경을 넘었다. 두 나라 사이에 있는 다리를 건너는 도중 번지점프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 물론 터무니 없는 가격이 주 이유이긴 했으나, 저 앞에 서면 쉽게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번지점프를 하지 않았다. 몇 년 전에 스카이다이빙 할 때는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스카이다이빙과 번지점프는 다르니까.

 

잠비아 국경을 넘으면 리빙스톤(Livingston)에 도착하게 된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이자 탐험가인 리빙스톤의 이름과 동일한 도시다. 리빙스톤이 여기서 폭포를 발견했고,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라 지었으니 이 도시는 리빙스톤이 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하루는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던 어느 여자가 나에게 자전거를 탈 건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미국인 여행자 케롤린이었다. 덕분에 숙소에 있던 다른 여행자와 함께 우루루 몰려가 자전거를 빌려 나가게 되었는데, 문제는 자전거 페달 밟는 게 너무 힘들었다. 이게 말라리아 걸린 이후에 힘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더운 날씨에 체력까지 떨어져서인지 모르겠다. 그리 어렵지 않은 동네 한 바퀴 도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제 자전거는 못 타겠다.

 

우리는 조금 외곽이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시장을 구경하기도 하고, 작은 마을을 돌았다. 간혹 맨발의 어린 아이들이 일곱 대의 자전거가 지나가는 것을 빤히 쳐다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내 자전거에도 문제가 없진 않았다.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바퀴에 바람이 빠진 것이다. 다행인지 우리 무리에는 자전거로 무려 6년간 여행하고 있던 터키인 쿠르칸이 있었다. 그는 내 자전거를 뒤집더니 바퀴를 빼서 응급조치를 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바람난 구멍을 메우고는 바람을 채웠다.

 

리빙스톤에서 만난 다른 한국인 여행자와 함께 나는 또 다시 빅토리아 폭포로 향했다.

 

단순히 짐바브웨는 30달러, 잠비아는 20달러로 입장료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빅토리아 폭포를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양쪽 모두를 보고 싶어하는 여행자가 꽤 많다.

 

일부 구간만 비가 쏟아지던 짐바브웨쪽 빅토리아 폭포와는 달리 잠비아쪽은 사방에서 비가 내렸다. 이번에도 우의를 챙겨 입지 않은 나는 본격적인 폭포를 보기 전부터 홀딱 젖고 말았다. 사실 젖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는데 폭포가 아예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문제였다. 아무리 우기라 수량이 불어났다고는 하나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 내가 있는 곳이 폭포인지 아니면 소나기가 쏟아지는 산 위에 있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때문에 카메라는 항상 가방 안에 넣고 걸어야 했다.

 

물론 잠비아에서 보는 빅토리아 폭포도 대단했지만, 만약 건기에 왔다면 조금 더 괜찮았을 것 같다.

 

특이한 여행자는 어딜가나 있다. 앞서 말한 자전거로 세계일주 중인 터키인 구르칸은 한국에도 와봤다고 했으며, 영국인 니콜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배낭여행과 캠핑을 하고 있었다. 리빙스톤에서 마지막 날, 숙소에 남는 방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텐트를 치게 되었는데 서로 비슷한 형태인데다가 같은 브랜드였다. 우리는 각자의 집을 구경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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