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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토샤 국립공원(Etosha National Park)를 빠져 나온 우리는 서쪽으로 향했다. 다음 목적지 오푸오(Opuwo)로 약 400km 떨어진 곳이다. 갈 길이 멀다.

 

에토샤에서 여행하는 동안 계속 비포장도로만 달려 오랜만에 나타난 잘 닦여진 도로가 반가웠다. 3일간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며 흙먼지를 마셨으니 정말 반갑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오푸오로 가기 전 나름 큰 도시라고 여겨진 온당와(Ondangwa)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결정으로 인해 사건이 벌어졌다. 물론 꼭 그것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대형 마트 앞에 주차를 했다. 나미비아를 비롯해 남아프리카 지역에는 픽앤페이(Pick&Pay)나 숍라이트(Shoprite)와 같은 대형 마트를 쉽게 볼 수 있었고, 근방에 패스트푸드점도 자리 잡고 있어 간단히 허기를 채우기 좋았다. 그래서 그날도 아무 생각 없이, 아니 어쩌면 당연히 마트 앞으로 찾아간 것이다.

 

난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폈다. 그때 내 뒤에서 다가온 3명이 우리 차 바퀴에 문제가 있으니 보라는 말을 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살짝 돌려 바퀴를 봤고, 혹시나 싶어 만져도 봤다.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나는 뭔가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는데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나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냥 이상한 녀석들인가 보다, 싶었지만 나는 그 찝찝한 기분의 이유가 무엇인지 너무도 빨리 눈치챘다.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사라졌다. 가방을 열어보고, 조수석을 다시 살펴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휴대폰을 소매치기 당한 걸 깨달았다. 정말 황당할 정도로 수법이 자연스러웠고, 순식간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대단했다.

 

당연히 휴대폰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나는 당황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람들에게 실망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주변 사람에게 하소연했는데,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던 몇 명의 아주머니는 내가 소매치기를 당하는 것을 다 봤다고 털어 놨다. 물론 제 3자가 통역을 해줬지만 눈만 깜박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을 보고 소매치기를 당한 것보다 더 어이가 없었다. 영어를 해도 알아들을 턱이 없었지만 난 그 자리에서 그걸 보고도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냐며 화를 냈다. 여기는 그런 곳이다. 소매치기를 한 놈보다, 소매치기를 당한 놈이 더 이상한. 남이 잘못 된다 해도 그건 내 일이 아니라 참견할 필요가 없는 그런 곳. 내가 화가 났던 건 소매치기를 당해서가 아니라 바로 앞에서 모든 걸 본 몇 명의 사람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년 8개월 간 여행을 하면서 여러 사건을 겪곤 했지만 소매치기를 당한 건 처음이었다. 나미비아에서 여행자를 상대로 소매치기가 번번히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내가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5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더러운 기분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휴대폰 유심을 정지 시킨다 한들,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쓴다 한들 휴대폰은 돌아오지 않았다. 덕분에 예상치도 못한 도시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한참 후 오푸오에 도착했을 때는 여태까지 지나온 도시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황량하고 메마른 땅 위에 세워진 건물 역시 생기가 없었고, 깊숙한 오지에나 살고 있을 법한 힘바족과 젬바족이 가슴을 드러낸 채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오푸오는 힘바족을 보기 위해 찾았지만 거리에서, 마트에서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니 정말 신기했다. 깨끗한 거리에 현대식 건물이 올라가 있던 빈트후크와 비교하자면 180도 다른 도시였다.

 

숙소로 정한 곳은 산 정상에 있는 오푸오 컨트리 롯지(Opuwo Country Lodge)였다.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나는 곳으로 예상대로 가격이 전혀 저렴하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야 캠핑장에서 텐트를 칠 예정이었지만.

 

로비에서 앉아 연결되지 않는 와이파이를 확인하며 한탄하고 있을 때 맞은편에 있던 스위스인 여행자와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다. 그리고 뒤에서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영국인 아저씨가 끼어 들었다. 그날 저녁 멤버였다. 영국인이었지만 몇 십 년간 나미비아에서 살고 있던 아저씨는 와인 한 병을 순식간에 해치우며 빈트후크로 오면 꼭 연락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물론 술에 잔뜩 취한 상태로.

 

나름 비싼 숙소였지만 캠핑장은 텐트를 치기 적합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미비아를 여행하는 대다수는 캠핑카로 다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지역의 땅이 메말라 그런지 아무 것도 없는 땅바닥이 캠핑장이었다.

 

에토샤 여행이 꽤 힘들었던 탓인지 그냥 쉬기로 했다. 나는 간신히 연결된 와이파이로 인터넷을 했고, 니콜라는 그림을 그리거나 수영을 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보냈다.

 

오푸오에는 붉은 피부색의 힘바족을 비롯해 독특한 의상의 헤레로족, 알록달록 색상의 목걸이나 머리띠로 치장을 한 젬바족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카메라를 꺼내 그들 사진을 찍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내가 줌 렌즈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하반신만 가리고 있는데 내가 카메라를 꺼냈다간 내 쪽으로 시선이 모아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리를 걷다 보면 외국인은 우리에게 다가와 돈을 달라고 하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오푸오에서 힘바족을 보는 것도 신기하긴 하지만 우리는 현지 가이드와 함께 힘바족 마을을 찾아가기로 했다.

 

힘바족으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화장실 앞에 그려진 그림이 재미있다.

 

다음날 아침 힘바족 마을로 가기로 약속을 잡고 나왔다. 밖에서는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던 아이들이 다가와 몇 마디 말을 걸었는데 영어로 소통이 될 리가 없었다. 대충 이 근처에 산다는 것과 힘바족은 아니라는 것(빨간색 피부와 가죽 옷을 입지 않은 것으로 구분이 되긴 했지만)을 알게 됐다.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하니 웃으면서 자리를 잡는다. 돈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은근 여행자에게 뭔가를 바라는 듯한 느낌은 조금 들길래 나는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며 가방을 뒤져 포토프린터를 꺼냈다. 그리고는 방금 찍은 사진을 인화해서 줬다. 돈이 아니라 실망하는 게 아닌가 했는데 사진을 받아 든 아이들은 신나서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다녔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푸오의 분위기는 그다지 밝지 않다. 곳곳에서 황량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장치가 눈에 띈다. 가로등은 있었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고, 곳곳에는 간신히 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는 집이나 텐트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과거 앙골라 내전 당시 많은 난민이 이곳으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오푸오에서는 흙으로 만든 집은 그리 어색하지 않다.

 

힘바족 마을을 찾아가기 전 우리는 약간의 선물을 준비했다. 이건 가이드가 미리 말해서 알고 있었던 사항으로 우리가 돈을 내면 가이드는 그 돈으로 알아서 힘바족이 필요한 물건을 구입했다. 옥수수 전분, 식용유, 빵, 바디로션 등으로 주로 생필품이다. 사실 힘바족 마을을 가는데 입장료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어쩌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리 배낭여행자라도 그리 부담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빅토리아 드레스’라 불리는 독특한 의상을 입는 헤레로족 가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힘바족이 더 흥미로웠던 게 사실인지라 우리는 힘바족 마을만 가보기로 했다. 우리는 가이드를 태우고 오푸오 시내를 나와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투어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가이드 없이는 힘바족 마을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힘바족과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가이드는 영어는 물론 힘바족의 말을 할 수 있어(사실 그는 힘바족이었다!) 우리가 궁금한 건 즉시 통역해 주기 때문에 꼭 필요했다.

 

힘바족 마을로 진입하기 전 우리는 작은 호수에서 멈췄다. 멀리서 물을 길으러 온 힘바족과 마주했다. 오푸오 시내에서는 가까이에 힘바족이 있어도 쉽게 말을 걸 수 없었는데 이곳 사람과 안면이 있는 가이드가 있으니 이것저것 물어 볼 수 있었다. 이 물을 가져다 어디에 쓰냐고 물어보니 식수로 쓴다 했다. 고여 있는 호수, 딱 봐도 탁한 색깔의 물을 그대로 마신다고 하니 그때만 해도 뭔가 다른 방법으로 정수를 한 후 물을 마시는 줄 알았다.

 

힘바족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족장님을 찾아가 마을을 둘러봐도 괜찮은지 허락을 받았다. 가이드 말로는 대부분 허락하는 편이고, 간혹 허락하지 않는다면 다른 마을을 찾아가도 된다 했다. 그늘진 곳에서 앉아 쉬던 족장님은 인자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줬다. 한국에서 그리고 영국에서 왔다고 소개하자 힘바족과 같은 부족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나미비아에 살고 있지만 나라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삶의 영역은 같은 부족과 다른 부족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 부근이 전부니까.

 

역시 우리를 가장 반겨주는 사람은 아이들이다.

 

족장님의 허락을 맡은 우리는 한창 요리 중인 집으로 들어가봤다.

 

집이라고는 하지만 땅바닥과 그리 다를 바가 없는 이곳에서 말린 옥수수를 하나하나 빻고 있었다. 동아프리카에서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나미비아에 살고 있는 힘바족도 마찬가지였다.

 

나무기둥 사이로 아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의 반응이 신기했나 보다.

 

옥수수를 하나씩 집어다 돌 위에서 빻고, 가는 작업을 반복했다. 우리는 앉아서 지켜보다가 해보고 싶어졌다. 가이드에게 의사를 전달하니 흔쾌히 자리를 비켜준다. 하지만 난생 처음 해보는 옥수수 빻기는 보기보다 쉽지 않다. 옥수수를 하나씩 집어 빻을 때마다 멀리 튀기 일쑤였으며, 돌판에 옥수수를 갈을 때는 지겹고 팔이 아픈 작업을 반복해야 했다. 몇 분 하다 힘들다고 말하자 힘바족 아낙네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은 언제나 웃고 있었지만 힘바족이 사는 모습을 보면 우리 입장에서 굉장히 열악하다 할 수 있다. 건조한 땅에서 몸을 지켜줄 신발과 옷은 당연히 없고, 편안하게 쉴 집도 맨바닥이나 다름 없었다.

 

한참 쭈그려 앉아 있던 곳을 나와 마을을 다시 돌아봤다. 원래 일정은 2시간이었으나 가이드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머물러도 된다고 해서 천천히 돌면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당연히 전기가 들어올 리가 없으니 냉장고도 없다. 작은 구멍만 있는 이곳이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였다.

 

옆집으로 가보니 그늘진 곳에 많은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한 아이는 끈으로 매단 박을 흔들었는데 이는 염소젖으로 요거트와 같은 형태로 만드는 과정이다.

 

좁은 집에 왜들 다닥다닥 붙어 지내고 있는지는 밖에 나가보면 알게 된다. 눈을 뜨기 힘든 태양빛과 건조하고 더운 날씨는 단 몇 분도 견디기 힘들 정도다. 때문에 힘바족은 붉은 색의 돌 오크라를 갈아 만든 진흙을 몸에 발라 피부를 보호한다. 힘바족의 피부가 다른 부족과 달리 붉은색을 띄고 있는 건 바로 이 붉은 진흙을 오랫동안 바르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우리가 궁금한 것이 있어 질문을 하면 바로 통역을 해줬다. 현재 이 마을은 족장님을 중심으로 3명의 부인이 있다고 한다. 구성원 중에는 유난히 아이들이 많이 보인다. 첫째 부인만 하더라도 아이가 9명이라고 했던가. 상대적으로 성인 여자는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이유로는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이 있는 다른 부족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례인 걸 알았지만 밖으로 나가 사진을 찍으면 어떻겠냐고 얘기했다. 사진을 찍은 뒤 미리 준비한 포토프린터로 인화를 해줬다. 사진을 건네주니 무뚝뚝해 보이던 아주머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이들은 서로 사진을 보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처음으로 생긴 가족 사진일지 몰라 좋은 선물이 된 것 같다.

 

누군가는 힘바족 마을을 찾아가 열악한 환경을 구경하고 사진으로 담는 게 과연 정당할 수 있냐고 비판할 수 있다. 어쩌면 동물원에 가서 우리에 갇혀 있는 동물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당연히 여행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힘바족 삶을 이해한다거나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다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현지 가이드와 함께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고, 대화도 많이 나누어 서로 즐거웠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만약 사진을 찍겠다면 미리 물어봐 실례가 되지 않는지도 확인하고. 사실 가장 중요한 건 여행자의 마음가짐이라 믿는다.

 

다른 집으로 들어가봤다. 이곳 역시 주방인지 냄비를 올린 후 불을 지폈다. 여기에는 족장님의 다른 부인이 있었다.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는 아프리카의 국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음식이다. 옥수수 전분과 물을 섞어 끓이면 점성이 있는 덩어리가 만들어지는데 우리나라의 떡 백설기와 매우 비슷하다. 대신 아무 맛도 안 나기 때문에 보통은 반찬이 되는 다른 음식과 같이 먹는 편이다. 이 음식은 아프리카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나라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스와힐리어를 사용하는 케냐나 탄자니아에서는 우갈리라 부르고, 말라위에서는 시마, 우간다에서는 포쇼였다. 나미비아와 남아공에서는 팝이라고 부른다.

 

팝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던 아이는 목이 말랐는지 물통에서 물을 받아 마셨다. 조금 전에 내가 봤던 그 호수에서 떠온 물이다. 여기에 정수 시설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어도 막상 아이가 탁한 색깔의 물을 그대로 마시는 모습을 옆에서 보게 되자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끓여서 마시는 게 낫지 않겠다는 말을 꺼내긴 했지만 여기는 그럴만한 여력이 안 된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가이드가 우리를 한국과 영국에서 온 여행자라고 소개하자 그곳은 비가 많이 오냐고 물었다. 비가 오기도 하지만 아직 날씨가 추워 눈도 온다고 하자 자신들을 데려가 달라는 말을 했다. 특히 금년도에 비가 거의 오지 않았다며 비가 많이 오는 곳을 가보고 싶단다. 나미비아 전체적으로 물이 심각하게 부족하지만 이곳은 사막지대라 특히 더 메마른 땅이었다.

 

사람은 물론 강아지에게도 척박한 곳이다. 갑자기 난 이곳 사람들이 나미비아의 다른 지역을 가봤는지 궁금해졌다. 족장의 셋째 부인이라고 했던 그녀는 놀랍게도 빈트후크에 가봤다고 했다. 다만 빈트후크에 가보니 그곳은 내 동네, 내 고향이 아니라고 느꼈다고 한다.

 

아이들은 냄비 채 들고가 손으로 팝을 긁어 먹는다. 보통은 고기나 생선에 팝을 먹었던 나는 무슨 맛으로 먹을까 궁금했다. 우리로 치면 반찬 없이 쌀밥만 먹는 셈이니까.

 

이미 이 마을에서 2시간 이상 보냈음에도 다른 집에 또 들어가봤다. 나무 기둥만 세워뒀던 다른 집과는 달리 이곳은 진흙으로 외부의 열기를 완전히 차단했고, 바닥에는 가죽을 깔아 정말 집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만난 힘바족의 여인은 낯선 여행자에게 굉장히 친근하게 대해줬다. 우리가 벽에 걸려 있는 옷을 보고 신기해하자 직접 옷을 입는 모습을 보여줬다. 정확한 설명을 듣지는 못했지만 똑같아 보이는 조금 더 장식과 무늬가 있어 덧붙여 입는 옷이 있었다. 외출복처럼 보였다.

 

니콜라에게 힘바족의 화장품이라 할 수 있는 가루를 선물로 주길래 나는 사진을 인화해서 줬다. 간단하고 작은 선물이었지만 신기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사진을 한 장 더 인화해줄 수 있냐는 부탁에 안은 너무 어두우니 밖에 나가서 찍으면 괜찮을 거라고 얘기했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으니 밖으로 나가 포즈를 취했다. 여기에 관광객이 얼마나 오는지 카메라를 얼마나 접했는지 모르겠지만 막상 카메라를 들이대자 어색해 하는 건 당연했다.

 

마치 우리를 친구처럼 대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마을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미리 준비한 선물을 건네줬다. 그 중에는 아이들에게 줄 사탕도 있었는데 누군가가 사탕을 나눠주려고 하자 아이들이 일렬로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사탕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은 어디나 똑같나 보다. 그나저나 아이들은 받은 사탕 포장을 뜯지 못했다. 이빨로 찢으려는 아이들의 사탕을 내가 손으로 뜯어 꺼내주니 전부 나에게 다가와 사탕을 내밀었다. 이미 하나를 입에 물고 있는 아이는 또 사탕을 뜯어 달라고 내밀었고, 내가 사탕을 꺼내주자 입에 털어 넣었다.

 

마을을 떠나기 전에 사탕에 눈이 팔린 아이들과 사진을 찍었다.


오푸오에서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남쪽으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비포장도로만 나와 속도를 좀처럼 낼 수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우연히 힘바족을 다시 만났다. 힘바족 여인들은 잠깐 차를 세운 우리에게 다가와 뭐라 말을 하는데 당연히 한 마디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 우리가 목적지를 말하자 자신들도 가고 싶다고 얘기를 하는 게 아닌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 태우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태워주겠다고 하자 무척 기뻐했다. 미리 천을 깔고 가지고 있던 짐과 아이를 데리고 탔다. 말린 생선이 있어서 그런지 파리가 계속 꼬였다. 


여행하면서 히치하이킹을 많이 해봤어도 누군가를 태워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힘바족 히치하이커라니. 우리는 대화를 전혀 할 수 없었으므로 음악만 틀어 놓고 남쪽으로 계속 달렸다.


1시간 반 정도 달렸을 때 힘바족 여인은 여기서 멈춰달라는 식으로 의사표현을 했다. 여러 사람들이 달려와 반겨주는 것을 보니 이곳이 친정인가 보다. 그녀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하긴 차로 1시간 반 거리를 걸어서는 올 수 없고, 지나가는 차도 워낙 없는 곳이라 이동이 쉽지 않을 테니깐. 우리는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모두에게 함박 웃음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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