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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젠의 가장 하이라이트인 지옥순례를 마치고 나서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계란이었다. 아니 계란이 뭐 대단한 것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온천에서 건져먹는 계란이 필수코스인 것처럼 사방이 온천인 운젠에서는 어찌보면 당연한 기대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보다 배가 고파서 견딜수가 없었다.

그래. 그렇다면 지금부터 지옥에서 건져 올린 계란을 찾아 나서볼까? 그런데 계란을 찾기도 전에 어떤 건물이 눈에 띄어서 들어가봤다. 휑한 분위기가 마을회관 느낌이 나던 곳이었는데 한쪽에서는 강의실처럼 작은 공간이 있었고, 다른 한쪽은 사진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운젠의 화산활동을 보여주는 사진일까? 아무튼 특별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몇몇 사진은 흥미롭게 구경했다.


밖으로 나와 버스정류장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는데 멀리서 보이는 풍경이 참 기묘했다. 땅속에서 끊임없이 수증기가 올라와서 마치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져있던 것이다. 심지어 차가 다니는 도로의 앞을 다 가릴 정도로 말이다. 신기하면서도 운젠은 조용한 시골마을이라 그런지 기묘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만약 밤이라면 공포영화의 특수효과는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계란을 찾아 다니는데 또 엉뚱한 장소가 눈에 띄었다. 운젠 방문자 센터라니 이런 곳은 예의상이라도 한번 들어가 주는 것이 나의 심리였다. 그래서 들어갔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별거 없었다. 운젠 주변의 지형, 안내 책자, 기념품을 파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버스정류장의 위치를 물어보면서 운젠의 계란을 파는 곳을 알아낼 수 있었다는 점은 성과라면 성과였다. 관광객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단체 관광객만 있어서 그런지 여기는 너무 조용했다.


그때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니 어떤 아가씨가 이것을 들고 왔다. 작은 복주머니 열쇠고리 혹은 휴대폰 고리로 보였는데 친구가 한국에 놀러갔다가 사준 선물이라고 하면서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다. 잠깐 고민했지만 나는 복주머니의 뜻이 복을 기원하는 것이니까 "Lucky!" 라고 대답해줬다. 뜻을 말하니 그녀는 무척 흡족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운젠에서 파는 지옥계란을 먹기 위해서는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수증기가 자욱한 다리를 건너고 우측으로 가보니 작은 집이 나왔다. 여기가 바로 계란을 파는 곳이었다.


마침 계란을 까먹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데 처량하게 쳐다보는 강아지에게 계란을 던져주니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리고는 계란을 먹고 일어난 사람이 걸어가자 그들을 졸졸 따라갔다.

운젠에서 파는 계란의 가격은 무려 4개에 300엔, 당시 환율로 무려 4200원이었다. 난 그저 계란 하나만 먹고 싶었을 뿐인데 4개씩 묶어서 파니 다시금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가난한 배낭여행자 심리가 발동되었다.

'이걸 살까 말까? 아니 고작해야 계란인데 300엔이라는 게 말이돼?'


그래도 샀다. 배고파서 혹은 운젠의 계란이 먹고 싶어서라는 충동적인 욕구가 300엔은 아무렇지도 않은 돈으로 바꿔버렸다. 근데 나는 운젠에서 파는 달걀이라면 적어도 팔팔 끓고 있는 온천수에 담궈져서 나온 계란을 바로 꺼내주는 줄 알았는데 그냥 보관통에서 꺼내 나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계란 4개와 소금 하나가 비닐봉지에 담겨있는 채로 말이다.


운젠에서 맛보는 지옥맛 계란은 특별해 보이지 않은 그냥 계란이다. 운젠의 계란은 뭐 황금이라도 있을까봐?


배고파서 그런지 계란은 쫀득쫀득하면서도 맛있었다. 물론 300엔은 여전히 비싸다고 느껴졌지만 물가가 비싼 일본에서는 보통 계란의 가격이 이정도 하니까 그러려니 했다.


의자에 앉아 계란을 먹으면서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여전히 내 앞에서는 수증기가 올라와 나의 시야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이런 운치가 있는 곳에서 계란을 까먹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돌아가는 길에 어떤 냄비를 발견했는데 바로 여기에서 계란을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운젠에서 올라오는 수증기나 지면의 열을 이용해서 익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약간은 실망스러웠다. 물론 유황냄새가 풍기는 물에 담궈도 괜찮을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온천수에서 익혀서 나오는줄 알았기 때문이다.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운젠의 분위기는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오히려 이런 악조건에서 사는 사람들이 더 신기하고 대단해 보였다. 멀리서 그윽하게 나를 쳐다보는 강아지가 있길래 귀여워 해줄려고 가까이 다가서자 갑자기 돌변하며 짖어대길래 완전 깜짝 놀랐다.


온천 마을답게 곳곳에는 족욕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현재 시각 3시 37분. 운젠에서 시마바라로 가는 다음 버스는 4시 13분에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조금 여유가 있었던 상황이라 미처 먹지 못했던 점심을 먹기로 했다. 계란으로 점심을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우선 근처에 있는 식당을 찾아봤다.


일본어는 전혀 읽지 못하는 까막눈인 나에게 그림보다도 더 자세하게 실제 음식처럼 전시해 놓은 식당을 발견했다. 쇼윈도에 올라와 있는 음식들을 보면서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면요리로 선택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식당은 살짝 허름해 보이는 전형적인 시골스러운 식당이었다. 손님은 내가 들어갔을 때 아무도 없었다.


문제는 안으로 들어가니 메뉴판이 일어로만 적혀 있어서 아까 본 음식이 어떤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조금 우스운 상황이 연출되자 할머니께 "아노... 캉코구데스. 니혼고 와까리마셍.(한국사람입니다. 일본어 몰라요.) "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설명을 하려다가 나와 같이 밖으로 나갔다. 내가 음식을 선택하자 재차 확인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주방에서 열심히 지지고 볶는 동안 나는 물을 마시며 TV를 봤다. 잠시 후 주문했던 음식이 나왔는데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 짬뽕이라고 대답해줬다.


짬뽕은 우리나라에서 먹는 것과는 상당히 많은 차이가 있다. 우선 붉으스름하고 한국과는 전혀 반대의 색을 가지고 있었고, 야채나 고기가 잔뜩 들어간 것이 특징이다. 물론 짬뽕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나가사키에서는 해산물이 들어갈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곳에서 먹었을 때는 해산물이 없었다.

맛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맛있지도 않았다. 약간은 느끼하면서도 자극이 덜해서 그런지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배고파서 그랬을까?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이제 배도 채웠으니 시마바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갔다. 짬뽕을 먹으면서도 혹시 시간을 지나칠까봐 계속 시계만 쳐다봤었는데 이런 시골 마을에서 버스를 놓치면 모든 계획이 틀어져 버리게 된다. 버스도 몇 대 없으니 당연히 배차 시간도 길기 마련이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자전거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이 가득 보였다. 아니 어떻게 이런 곳을 자전거로 올라올 수 있는지 신기해 하면서 쳐다보고 있었는데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한국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전거 동호회에서 여행이라도 온 것일까? 아무튼 그런 궁금증이 증폭될 때쯤 마침 버스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