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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 도착하자마자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다. 잠도 제대로 안 자고 출발했기 때문에 피로감이 극에 달했던 것이다. 그래서 게스트하우스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낮잠을 잠깐 청하고, 그 다음에 일어나서 계획을 세워보기로 했다. 정말 피곤했긴 피곤했나보다.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어서 정신없이 잤다. 2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니 몸이 약간 개운해져서 이제 돌아다닐 마음이 생겼다.


게스트하우스를 나와 모노레일을 타고 간 곳은 종착역이었던 슈리역이었다. 아무래도 모노레일 1일패스권을 구입했기 때문에 모노레일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했고, 첫날에는 나하 시내를 둘러볼 계획이라서 가장 먼저 슈리성을 가보기로 했던 것이다.

아마 오키나와를 가기 전만 하더라도 별로 관심이 없었을텐데 과거 이 땅은 류큐왕국이라는 독립적인 나라가 있었던 곳이었다. 물론 힘이 없어서 중국을 섬기는 그런 나라였고, 나중에는 일본에 강제로 편입되었지만 엄연히 일본과는 다른 나라였던 것이다. 지금이야 오키나와는 일본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오키나와에 사는 사람들도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만약 창씨개명과 일본이 점령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니 그것보다 일제점령기 시대에 우리나라도 창씨개명을 하고, 계속 지배를 받아 강제로 일본으로 편입되었다면 오키나와처럼 일본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새삼 일본이 가진 야욕을 느낄 수 있었다.


슈리역에 도착하자마자 점심을 먹으러 어느 식당에 들어갔다. 일본식 카레를 파는 곳이었는데 나는 돈가스 카레를 주문했다. 배고프기도 했지만 꽤 맛있어서 허겁지겁 걸신이 든 것처럼 먹었다. 시원한 물 한잔도 들이키니 살 것 같았다. 확실히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물을 그냥 주니까 참 좋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물도 다 사먹었어야 하는데 일본은 항상 얼음을 동동 띄워서 물을 주곤 했다.

이제 배도 채웠으니 슈리성을 찾아가기로 했다. 슈리성은 슈리역에서 약 15분 정도 걸어가야 나오는데 실제로 입구까지는 15분 이상 걸렸다. 거리를 걸으면서 나하 시내를 둘러보는데 생각만큼 오키나와만의 특징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건물이 많이 낡아 보였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일본의 지역과 차이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이젠 완전히 일본이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약간의 언덕길을 지나니 드디어 슈리성이 나타났다. 거대한 성벽이 관광객을 향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오키나와의 최대 볼거리는 역시 슈리성일 것이다. 큐슈지역을 여행하면서 이미 여러 성을 봐왔지만 슈리성은 류큐왕국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기 때문에 다른 성과는 확실히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걸어갔던 곳에 바로 문이 나타났지만 여기는 입구가 아니었다. 슈리성의 외벽은 생각보다 높고, 규모다 컸다. 그런데 이런 거대한 성이 겨우 일본군 3000명에게 점령을 당했다니 그러고보면 류큐왕국의 군사력이 참 형편없었나 보다. 어쩌면 군사력보다 부족을 통합한 작은 나라라서 구심점이 없어서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일본이야 본토에서 치고박고 싸우면서 세력을 키웠을테고, 무기도 진보되었을테니 바다 건너 먼 곳에 있던 류큐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슈리성을 들어가기 전에 담벼락 위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던 고양이가 무척 귀여웠다. 사람들도 "와~ 까와이~" 라며 사진을 찍는데 고양이는 더 깊은 잠에 빠져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슈리성의 입구에는 역시 관광객으로 가득했고, 대부분은 일본인 관광객이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내가 갔었던 그때가 일본 최대 성수기나 다름없었던 휴가철이었다. 연달아 이어지는 휴일에 사람들은 여행을 온 상태였다.

슈리성에서 재미있었던 것은 각 구역마다 스탬프를 찍는 장소가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유난히 스탬프 찍는 것을 좋아하는데 슈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도에 각 구역별로 스탬프를 다 찍으면 기념품을 주기도 하는데 문제는 어린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부모와 함께 옆에서 스탬프를 찍는 아이들의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슈리성 입구에서 한참 들어가야 입장권을 파는 곳이 나온다. 그러니까 여기까지는 돈을 내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슈리성 내부로 들어가는 입장권은 무려 800엔. 너무 비싸다고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슈리성까지 와서 안 들어갈 수도 없는 법이니 그냥 들어갔다.


여기가 바로 류큐왕이 있었던 세이덴이다. 안타깝게도 슈리성도 다른 일본의 성과 마찬가지로 복원된 뒤다. 따라서 내부는 박물관의 형태로 바뀌었고, 모습도 무척 인공적이다. 여기에서부터는 세이덴을 바라보고 우측의 입구로 들어가서 좌측으로 나오는 길을 따라 이동하면 된다.


가장 먼저 들어갔던 곳은 쇼인인데 이곳은 왕이 집무를 보거나 중국의 사신이 오면 머물렀던 장소라고 한다. 역시 복원되어서 인공미가 가득하다. 간혹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곳도 있어서 그냥 둘러보기만 했다.


정전은 사진촬영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진을 찍을만한 것이 많냐면 또 그것도 아니다. 800엔을 내고 들어가기엔 조금 아깝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류큐왕이 앉았던 자리도 찍어본다.


옥새도 찍어본다.


왕관도 찍어본다. 세이덴의 내부는 이렇게 쉽게 끝이 난다. 세이덴을 지나 호쿠덴으로 건너가면 슈리성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공간, 비디오 감상실, 기념품을 파는 곳이 나온다.


과거 류큐왕국의 재연한 미니어쳐를 살펴보면 중국에서 온 사신 앞에 류큐왕이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류큐왕은 중국의 사신보다도 낮은 위치가 맞긴 맞나보다. 그랬기 때문에 독자적인 나라로 발전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슈리성에 대한 질문이 있는 판넬을 직접 열어보고 확인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사소한 것이지만 복원과정이나 역사에 대해서 퀴즈형태로 알아볼 수 있어서 나름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800엔 내고 본 슈리성은 이게 끝이다.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오키나와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이기도 한데 조금 허무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오키나와까지 왔으니 슈리성을 안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성보다 굉장히 인상적이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류큐왕국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은 조금 위로가 된다.


어쩐지 돌담도 인공미가 철철 넘쳤지만 그 길을 따라 나하 시내를 바라봤다. 흐리멍텅한 하늘 색깔과 회색빛이 감도는 건물들이 서로 뒤섞였다. 이렇게 슈리성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니 새삼 오키나와가 큰 섬이라는 것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나하만 하더라도 왠만한 도시보다 컸다. 근데 그것보다 날씨가 저러니 조만간 비가 올 것 같았다.


오키나와 왔으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아이스크림이다. 맛있긴 했는데 왜 오키나와 아이스크림이 유명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 아이스크림이 아닌가?


이제는 슈리성이나 전통의상을 입고 기념촬영을 하는 것으로 류큐왕국의 흔적을 잠깐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오키나와는 어느새 일본땅이 되어버렸고, 일본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이 되어버렸다. 찬란한 문화를 가지지도 않았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은 섬기던 작은 나라가 130년 전에는 있었다. 그러나 류큐는 이제 지도 상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