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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다리를 이끌고 겨우 내려온 이젠 화산. 내려 오자마자 나는 발리로 데려다 줄 밴을 찾았다. 혹시나 나 때문에 일정이 늦어지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어 서둘러 달려갔는데 다행히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에 서양 친구들에게 다가가 다리를 다쳐서 늦게 내려와 미안하다는 말을 하자 그들도 내려온지 얼마되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다리는 어떠냐며 조금 걱정해줬다.


이제 이 덥고 작은 밴에 의지해 발리로 이동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 밴을 타고 발리까지 이동하지는 않았다. 조금 더웠지만 차라리 이 밴으로 발리까지 데려다 줬으면 훨씬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겨우 한숨 돌린 나는 근처 가게에 가서 물부터 한병 샀다. 가격이 평소보다 1.5배였지만 너무 목말랐기 때문에 그냥 구입했다. 물을 반쯤 마시니까 이제 출발한다고 어서 타라고 한다. 2박 3일 내내 이동하고, 화산을 오르느라 정말 피로감은 극에 달했는데 발리에 도착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푹 쉬기만 해야겠다.


이젠 화산을 내려오는 길은 쉽지 않았다. 여기가 오지라고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온통 돌밭이라 차가 제대로 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너무 심한 길은 도저히 사람을 태우고 지나갈 수 없어서 우리가 전부 내린 채 밴만 앞질러 이동한 적도 있다. 우리가 탄 후에도 한참을 기우뚱 거리며 아주 천천히 달려야 했다.

여전히 에어컨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덥다. 게다가 이젠 화산에서 맡았던 유황 가스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젠 화산의 칼데라 호수에서 터졌던 유황 가스의 충격적인 느낌은 한동안 지속되었는데 그정도로 강렬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곳에서 유황을 캐는 사람들의 모습은 쉽게 지울 수 없었다.

이젠 화산에서 출발한지 약 2시간 반, 발리로 이동할 수 있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많은 여행자가 발리로 넘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부분 족자카르타나 수라바야 등지에서 출발해 브로모를 거쳐 온 사람들이었다.


언제 발리로 넘어가는지 알 수는 없으나 최소한 점심은 여기에서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우리를 내려준 곳 바로 앞이 식당이라 아무 생각없이 주문했는데 맛은 별로였다. 대충 허기만 때우고 발리로 가는 버스만 하염없이 기다렸다. 이러는 와중에 마욤과 임마누엘은 먼저 발리로 가겠다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들은 단체로 버스를 타고 발리로 이동하는 것보다 일단 섬으로 건너간 뒤 덴파사로 알아서 찾아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잠시 후 커다란 버스가 도착했는데 바로 발리 덴파사로 데려다 줄 그 버스였다. 커다란 배낭을 멘 여행자들은 우선 배낭을 싣기 위해 뒤에서 기다렸고, 버스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맨 뒷자리에 그들의 배낭을 꾹꾹 눌러 실었다. 내 배낭은 넣을 자리가 없자 정말 구석진 곳에 거의 쑤셔 넣어 버렸다.

버스는 정말 비좁았다. 아니 배낭과 함께 사람도 그냥 쑤셔 넣은 것이다. 자리에 앉은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서서 가야 할지도 몰랐다. 다행히 그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가운데에 있던 사람들은 작은 목욕탕 의자에 앉아 발리까지 가야했다. 이런 자리가 아예 생소한 것은 아니지만 출발부터 험난한 여정이 될 것 같은 느낌이 스쳐갔다.


이런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라고 봐야 하나. 나는 주변을 살펴보며 옆에 앉은 외국인에게 "이거 한 50명은 탔겠는데?"라고 말하자 그는 "50명? 난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는데?"라며 맞장구를 쳤다. 순식간에 한 줄에 5개의 의자가 있는 버스에 몸을 싣고 발리로 출발했다. 근데 사실 이 버스를 타자마자 선착장으로 이동했고, 곧바로 큰 배로 들어갔다. 우선 바다를 건너가야 발리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스가 멈춰선 후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일제히 내리기 시작했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 좁고, 답답한 버스 안에서 앉아 따분하게 있고 싶을 사람은 별로 없다. 확실히 밖을 나가니 바다 바람을 맞아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발리로 가는 건가.' 저 멀리 보이는 섬이 발리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항상 신혼여행지로만 생각했던 곳인데 이렇게 빨리 발리로 가게 될 줄 몰랐던 것이다.


바다에서 수영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얘네들은 왜 여기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을 때 옆에 매달려 있던 다른 한 아이가 바다에 뛰어든다. 구경하던 도중에 깜짝 놀랐는데 역시 나와는 다르게 잠시 후 아주 익숙하게 헤엄치며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그 아이들의 목적은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배를 타고 이동하는 손님들이 바다를 향해 돈을 던져주면 헤엄쳐서 잡는 일종의 쇼를 보여줬던 것이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그게 재밌다고 동전을 던져주거나 지폐를 꾸깃꾸깃 접어 바다에 던졌다. 그러면 아이들은 물개처럼 헤엄쳐서 돈을 집고, 바로 그들의 입속에 넣어 보관한다.


또 한 명의 다른 아이가 바다를 향해 뛰었다.


척 봐도 동네 개구쟁이 꼬마들이었다. 그냥 그 모습이 재미있어 지켜봤다.


배는 그리 넓지 않았으나 앉아서 갈 수 있는 자리는 있었다. 그런데 그냥 안에 있는 게 괜히 싫어 밖으로 나갔다.


고동소리가 들리고, 배는 발리로 출발했다. 바다에서 수영을 하며 돈을 달라던 아이들과도 서서히 멀어져 갔다.


배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앞머리 부근에서 키라를 발견했다. 키라는 무슨 이유인지 혼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가가 발리 어디서 머물 계획인지 물어보자 키라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내가 가지고 있던 론리플래닛을 잠깐 빌려 읽더니 소르가 골목쪽이 좋아 보인다고 손으로 짚어줬다. 사실 나도 어디서 머물지 몰랐다. 그저 우리는 앞으로 발리 덴파사의 우붕 버스터미널로 간다는 것과 거기에서 다시 쿠타 비치로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 밖에 몰랐다. 배낭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인지 몰라도 그냥 덴파사에 도착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별 계획조차 없었다. 


키라와 잠깐 대화를 나누며 사진을 찍다보니 발리에 거의 도착했다. 이제 다시 그 사람들로 가득찬 버스에 올라야 할 시간이다.


인도네시아 현지 사람들과 여행자들은 하나 둘씩 버스에 탔고, 나 역시 아까 앉았던 자리 근방에 앉게 되었다. 그러다가 옆에 앉은 서양인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서양인들이 많아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계속 나와 함께 밴을 탔던 여행자였다. 이름은 윌리였고, 프랑스인이었다.

그도 참 심심했는지 덴파사로 이동하는 동안 계속 나와 수다삼매경에 빠졌다. 그는 현재 6개월 가량 여행하고 있었는데 멕시코, 인도, 인도네시아 등을 거쳤고, 다음에는 태국으로 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멕시코가 정말 좋았으니 꼭 가보라고 추천해줬다. 반면 인도에 대한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는지 지저분했던 이야기를 주로 했다.


버스는 발리에 도착하자 인도네시아 사람들만 잠깐 내려 검문소 같은 곳을 지나쳤다. 무슨 신원 확인이라도 한 것일까? 아무튼 버스는 이제 덴파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플라스틱 의자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엉덩이가 아파왔다. 낭만이 가득할 것만 같은 발리로의 여정은 좁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더운 공기를 마시는 고통이 뒤따랐던 것이다. 이동하는 동안 윌리와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빠르게 변하는 바깥의 풍경은 간혹 커다란 사원이 보이기도 했고, 아시아 여행자가 봐도 신기한 라이스 테라스를 지나치기도 했다. 윌리와 같이 사진도 찍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덧 해는 지고, 주변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졌다. 이젠 슬슬 지겨워졌다. 발리가 이렇게 큰 섬인 줄도 몰랐고, 이렇게 이동하는 시간이 오래 걸릴 줄 몰랐다. 

한참 뒤에 깜깜한 어둠을 헤치고 도착한 곳은 우붕 버스터미널이었다. 역시 여행자를 보자 삐끼 아저씨들이 몰려와 자신의 택시를 타라고 꼬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키라 일행과 헤어졌다. 기약이 있을지 없을지 몰라도 나중에 쿠타에서 보자는 짧은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터미널에서 빠져 나와 택시를 찾기 시작했다. 대부분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 중에서 베모(Bemo) 한 대가 저렴한 가격에 흥정에 응해 이걸 타기로 했다. 똑같은 인도네시아이지만 새로운 도시에 도착했기 때문에 여기가 어딘지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그저 우리의 목적지인 쿠타 비치의 뽀삐스 거리만 생각했다. 뽀삐스 거리는 배낭여행자들이 머무는 곳으로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그곳으로 간다.


우붕에서 쿠타 비치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근데 막상 뽀삐스 거리 근처에 도착하니 화려할 것만 같았던 쿠타 비치가 생각보다 조금 어둡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사실 주변을 둘러볼 틈도 없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부터 찾아야 했다. 가만있자. 근데 뽀삐스 거리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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