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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하루가 지나갔다. 그래도 괜찮다. 혼자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뭘 하고자 하는 욕심도 없었으니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하루를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바다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서핑보드를 하거나 수영을 즐기고 있었고, 나처럼 모래사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맥주를 마시곤 했다. 간혹 앉아있는 나를 찾아온 아주머니는 마사지를 받지 않겠냐며 묻곤 했는데 이런 모래밭에서 별로 받고 싶지는 않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뽀삐스 거리로 향했다. 여전히 시끄럽게 달리는 오토바이 행렬과 그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마차가 이곳 도로의 상황을 대변했다. 그리고 여행자를 보면 아주 습관처럼 "트랜스포테이션?"이라고 물어보는 아저씨가 있는데 사실 이정도는 양반이다. 어떤 사람은 "아가씨?" 혹은 "머쉬룸?"이라며 아주 능글맞은 표정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꽤 있다. 사실 머쉬룸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는데 마약인지 아니면 그와 유사한 환각제인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뽀삐스 거리 1의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이 주변은 대체적으로 딱 서양인들의 입맛에 맞는 분위기와 메뉴를 가진 곳이 많았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지면에서 아주 약간 높은 곳에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고, 창문이라든지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 거리를 구경할 수 있었다. 적당히 어두운 조명 아래 촛불, 그리고 은은한 깔린 음악이 있었다.

가격도 저렴한 편이었다. 보통 밥값으로 1만에서 2만 루피아 썼던 것을 생각해보면 3만 5천 루피아짜리 스테이크는 그리 비싸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난 메뉴판을 보자마자 단번에 스테이크로 결정했다.


발리에서는 무조건 천천히 그리고 여유를 갖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저녁도 참 느긋하게 먹었다. 다른 테이블에서 저녁을 먹는 가족들도 구경하고, 거리에 지나다니는 여행자 구경도 실컷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3만 루피아가 넘는 저녁을 거의 다 먹었을 때 이 레스토랑 앞에서 윌리와 그의 친구들을 메뉴판을 살펴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윌리와 윌리의 여자친구도 역시 나를 발견했는지 내 테이블로 다가왔다.

윌리의 여자친구는 깨끗하게 비운 내 접시를 보면서 왜 혼자있냐고 물어봤다. 특별히 이유는 없고, 그냥 따로 다니고 있다고 하니 대충 알아 들었는지 끄덕였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시 물었다. 

"우리는 지금 술을 마시러 갈 생각인데 너도 함께 할래?"

"Why not?"

혼자 있던 내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같이 가자고 말해 줘서 고마웠다고나 할까? 옆에는 같이 밴을 탔던 서양 친구들이 몇 명 더 있었는데 사실 전부 안면만 조금 있을 뿐이지 서로 이름도 모르는 사이였다. 이 무리들 중에서 윌리는 발리 덴파사로 향하던 버스 바로 옆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친해질 수 있었다.


우리는 뽀삐스 거리 1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저녁을 먹지 않은 상태라 식사 대용으로 음식을 주문했고, 그런 후 칵테일이나 보드카 혹은 맥주를 각각 주문했다. 난 그냥 아무생각 없이 맥주를 골랐는데 다른 친구들은 독특한 술을 선택했다. 나중에 어떤 맛일지 궁금해 하니까 윌리와 윌리의 여자친구가 마셔 보라고 해서 몇 모금은 마셔 볼 수는 있었다. 

자리에 앉아 몇 마디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동양계 얼굴을 하고 있어서 대충 예상은 했지만 호주 국적을 가진 혼혈인 크리스(원래 이름은 크리스토퍼), 약간 강인한 인상을 보인 노드로그(몇 마디 나누지 못했다), 프랑스인 빈스, 역시 프랑스인 윌리와 그의 여자친구 버지니였다.


윌리의 여자친구인 비지니는 이젠 화산으로 가는 밴에서, 발리로 가는 버스에서 계속 보게 되었지만 뒤늦게 이름을 알게 된 것이다. 근데 처음 그녀가 나에게 이름을 알려줬을 때는 전혀 알아 듣지 못했다.

"내 이름은 말야. 버어엌지히잌닠야."

"뭐... 뭐라고?"

난 강한 액센트가 섞인 그녀의 생소한 발음에 적잖아 당황했다. 알고 보니 프랑스어로 발음하면 그렇다고 하고, 영어로 읽게 되면 버지니라고 부르면 된다고 했다. 곱슬거리는 머리와 커다란 눈을 가진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근데 우연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우리가 있던 레스토랑에는 키라와 아담도 있었다. 멀리서 둘이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들을 보며 눈에 하트가 뿅뿅이라느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느니 온갖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야 이들과 함께 여행한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전후사정을 모르겠지만 둘이 따로 어울리고 있으니 그런 추측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는지 키라와 아담은 한참 후 우리를 발견하고는 자리를 우리쪽으로 옮겨왔다. 대부분 각자 떠들면서 술을 마셨다. 난 주로 바로 맞은편에 앉은 윌리와 버지니랑 대화를 많이 했고, 때로는 옆에 있는 크리스나 빈스와도 몇 마디 나눴다. 그러는 와중에 크리스는 엄청난 식욕을 자랑했는데 배고팠다며 혼자 2개의 음식을 깨끗하게 비우기도 했다.

윌리와 대화를 나누다가 지금 상황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다는 생각에 이런 말을 꺼냈다.

"여행이란 참 좋은 것 같아. 난 프랑스를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프랑스 사람과 만나 얘기를 하고 있잖아."

윌리는 내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했다. 정말 그랬다. 여행이 아니었다면 내가 프랑스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있을까? 항상 여행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것은 역시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며칠 동안 함께 여행을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단 몇 분의 아주 짧은 만남도 있는데 그럴때마다 서로 다른 나라를 엿볼 수 있었다. 난 그런 게 무척 즐거웠다. 물론 여행하고 있는 나라인 인도네시아 사람을 만나도 마찬가지다.


여행의 매력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적어도 나에겐 '발리에서 생긴 일'은 없더라도 '발리에서 생긴 친구들'은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떠들다가 헤어졌다. 아주 늦은 시각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먹고 마셨으니 크게 아쉬움은 없었다. 다들 발리에서는 쉬고, 또 쉬자는 계획이라 11시가 가까워진 시각도 꽤 늦은 편이었다. 이들이 머물던 게스트하우스는 내가 묵는 곳과 같은 골목에 있었다. 서로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소르가 골목 앞까지 나도 같이 걸어갔다. 윌리는 헤어지기 직전 내일도 또 보자고 얘기했다. 다들 여기 근처에 있으니 내일도 지나가다가 또 볼 수 있을거라는 말을 한 것이다. 나도 또 만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다음날에는 우붓을 다녀오느라 그랬는지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원래 나도 숙소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그냥 이대로 들어 가기가 아쉬워 혼자 거리를 걸었다. 낮에도 이 주변을 제대로 걸어보지 못했던 까닭에 뽀삐스 거리 2나 르기안 거리쪽을 가보기로 했다.


뽀삐스 거리 1은 여행자 거리인데도 10시가 지나면 문을 닫는 상점이 꽤 많았고, 좀 어두운 편이었는데 반해 뽀삐스 거리 2는 좀 더 활기차 보였다. 그리고 르기안 거리쪽으로 가보니 화려한 클럽이나 바가 가득했다. 분위기는 신나서 좋긴 했는데 너무 서양인들의 놀이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전히 나만 그런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주변에 있는 클럽과 바는 서양인들로 가득했다. 난 이렇게 1시간 정도 밤거리를 걷다가 피곤해서 숙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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