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이상하게 우간다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어도 친숙했다. 그건 아마도 어렸을 때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서 “우간다? 나라 이름이 웃기네?”, 라고 기억했던 탓인 것 같다. 물론 20년 넘게 내전으로 얼룩진 소말리아가 더 유명하긴 했지만.


캄팔라에 도착한 이후 늘어져 지냈다. 도시 중심부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숙소를 잡아 지냈던 까닭도 있었지만, 그냥 정원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때우던 날이 많았다. 무려 6일간 캄팔라에 있었는데 흔히 말하는 관광지에는 단 한 군데도 안 갔다.


숙소 근처에는 재래 시장 은틴다 마켓(Ntinda Market)이 있었는데 지나가면서 과일을 사거나, 배가 고플 때면 싸게 먹을 수 있는 먹거리가 가득해 자주 애용했다. 6일간 거의 매일 가다 보니 사람들이 자연스레 기억하고는 미소를 보냈다.


케냐 음식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많은 점이 달랐다. 케냐와 마찬가지로 우갈리(백설기처럼 하얀 덩어리로 맨밥을 먹는 느낌)와 마토케(찐 바나나)를 기본으로 깔리기는 했으나 소고기나 염소고기를 넣은 국물이 있는 요리가 유난히 더 많았다. 시장에서 먹으면 우리나라 돈으로 1000~2000원에 불과하다.


캄팔라 시내는 전화 개통을 위해 딱 한 번 나갔다. 그런데 휴대폰 유심을 사는 과정에서 직원의 실수로 구입한 내 데이터가 전부 날라간 상황이 벌어졌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여기서는 내가 충전을 한 후 원하는 기간과 용량을 직접 데이터로 변환해야 하는데 그러한 과정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따지는 과정에서 끊임 없이 나를 무시하고, 기다리게 만들어서 결국 폭발했다. 3시간 동안 여기서 내가 뭐하고 있는 거냐며 소리를 높이니 다른 직원이 와서 다독였다. 그리고는 정식 절차를 밟아 내가 화가 난 이유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 직원은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난 적어도 복구가 안 되면 미안하다는 소리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분을 삭히지 못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동아프리카에 온 이후 이들은 자신의 실수에도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음식점에서 내가 주문한 것과 다른 게 나왔는데도 “주방에서 잘못 들었다네”라는 말을 눈도 껌빡이지 않고 얘기한 뒤 가버린 적도 있다. 요즘 한국에서는 손님의 행동이 지나치다 못해 ‘갑질 논란’이 심하다고 하는데 여기는 손님이 미안하다는 말을 듣기가 정말 힘든 것 같다.


자고 일어나 멍하니 있다가 은틴다 마켓으로 짜파티를 먹으러 갔다. 짜파티에 계란을 2개 추가하고 양배추와 토마토를 넣으면 아침으로 딱이었다. 가격은 고작 1500실링.


하루가 늘 똑같았다. 아침이나 점심을 먹으러 은틴다 마켓에 갔다가 졸리면 자고. 내가 자려고 우간다에 온 것인지 여행하려고 온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끝내 캄팔라 시내를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독일인 여행자 나탈리와 함께 무료로 운영되고 있는 미술관을 구경했다.


그렇게 6일이 지났다. 여행하면서 자주 늘어지기는 했어도 이번처럼 아무데도 가지 않은 채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이 게스트하우스에는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칠면조를 키우고 있었다. 칠면조의 행동 하나하나가 무척 이상해 웃음이 절로 났다.


포트포털(Fort Portal)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오랜만에 캄팔라 시내로 갔다. 버스터미널 부근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로, 마타투(미니버스)와 보다보다(오토바이 택시)로 뒤엉켜 있었다.


케냐만 하더라도 오토바이 택시는 정식으로 라이센스를 받은 사람만 조끼를 입고 운행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우간다에서는 그냥 아무나 할 수 있는 것 같다. 오토바이만 있으면 말이다.


사람들에게 물어 포트포털로 가는 칼리타 버스를 찾았는데 15분 뒤인 12시에 출발한다고 했다. 다음 출발 시간은 2시라, 캄팔라 시내를 잠깐이라도 걸어보겠다는 계획은 포기하고 버스에 올랐다. 캄팔라에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하는 모스크에 오르면 주변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걸 보지 못한 채 떠난 건 많이 아쉽다. 물론 캄팔라 뿐만 아니라 나일강의 수원지이자 빅토리아 호수의 도시로 알려진 진자(Jinja)도 그냥 지나친 건 아쉽기만 하다. 계획을 세우며 여행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남들처럼 관광지 중심으로 이동하지는 않아서 더 그런 것 같다.


버스는 한참을 달리고 달려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간단하게나마 허기를 채우려는 사람보다 뭔가를 팔려는 사람이 더 많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선택을 받는 것처럼 너나 할 것 없이 바구니를 높게 들었다.


한쪽에서는 숯불에 고기를 굽느라 냄새와 연기로 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소고기 꼬치는 1000실링(약 300원), 전에 시장에서 먹었던 것보다 더 맛있었다.


포트포털에는 오후 5시에 도착했다. 버스에 내려 주변을 살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작은 도시라 깜짝 놀랐다.


첸과 나는 딱히 다음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아 버스에서 론리플래닛과 지도를 보며 뒤늦은 계획을 세웠다. 계획이라고 해봐야 포트포털에 있는 많은 숙소 중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간단한 대비였지만. 우리가 정한 곳은 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예스 호스텔이었다. 거리가 멀어 보다보다를 타기로 결정, 아저씨한테 숙소 이름만 댔을 뿐인데 알고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물론 알고 찾아간 것은 아니었지만 예스 호스텔은 조금 특별한 곳이었다. 여행자가 내는 돈의 일부가 에이즈에 감염된 아이들에게 쓰인다고 한다. 우간다 아이들의 에이즈 감염률은 무려 5.4%에 달할 정도로 매우 심각하다. 그래서인지 우간다 곳곳에서는 에이즈 예방 관련 광고판을 볼 수 있다.


예스 호스텔에 함께 도착했던 미국인 여행자 조쉬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조쉬는 우간다 6일, 에티오피아 6일, 일정으로 매우 짧게 여행할 계획이라 1년 넘게 여행한 나를 보며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며 놀라워했다. 조쉬는 아시아 국가 중 일본과 한국을 무척 좋아했으며, 이번 4월에 한국을 여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숙소에서 국적은 캐나다 여행자(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홍콩에서 태어난 중국계 캐나다인)를 만났는데 함께 호수를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첸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아 결국 조쉬와 함께 호수를 여행하기로 했다. 다만 조쉬와 이 캐나다 여행자는 상극이라 잘 맞지 않았다. 중간에 꼈던 나는 가끔씩 불편한 기운을 느껴야 했다. 아무튼 우리가 처음 찾아간 곳은 은쿠르바(Nkuruba) 호수였다. 호수 주변에 괜찮은 캠핑장이 있어 나름 기대를 했는데 호수 자체는 볼만하지 않았다. 규모도 작았다.


역시 야생이긴 한가 보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 다니는 원숭이 무리를 아주 쉽게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원숭이는 사람이 다가오면 슬그머니 피하기 마련인데 이 원숭이는 내가 아래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무를 타고 내려왔다.


우리는 캠핑장 근처에 있던 ‘포레스트 로드’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점점 길은 거의 보이지 않아 숲을 헤치며 걸어야 했고, 반바지를 입었던 나와 조쉬는 풀에 베여 무척 고통스러웠다. 또한 어느 지점을 걸을 때는 무수히 많은 개미떼의 공격에 비명을 질러야 했다. 아주 잠깐 걸었을 뿐인데 개미가 온몸에 달라붙어 물어 뜯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위험한 길을 걷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고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거의 뛰다시피 ‘포레스트 로드’를 빠져 나왔을 때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잠깐 휴식을 취한 후 우리는 이 근방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니나불리트와 호수(Lake Nyinabulitwa)를 향해 걸었다. 은쿠루바 호수에서 약 5km 떨어진 곳이라 딱 걷기 좋아 보였다. 물론 교통편을 찾기가 더 어려워 보였다.


약 1시간쯤 걸었을 때 작은 마을과 사람들로 가득한 시장이 보였다. 오늘만 시장이 열린 것인지, 아니면 원래도 이렇게 북적거리는지 알 수 없지만 여행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좌판을 펼쳐놓고 과일을 파는 것은 그럭저럭 모양새를 갖춘 편이었고 대충 바닥에 옷가지 등을 놓고 파는 경우가 더 많았다.


사람들과 간단하게나마 인사를 나눴다. 낯선 여행자를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인사를 나누면 서로 웃음이 넘쳤다. 바닥에 놓인 옷을 고르느라 정신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장사를 하는지 마는지 낮잠을 자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가 몇몇 집을 지나칠 때면 어린아이들이 길 앞으로 나와 “하와유”라고 인사를 했다. 같은 아프리카라도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나 인사말이 달랐다. 이집트와 수단에서는 “웰컴”이라는 말로 인사를 많이 했고, 에티오피아에서는 “유! 유! 유!”라고 하며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케냐와 우간다에서는 “하와유”라고 했다. 재밌게도 케냐와 우간다의 리듬은 조금 다르다.


중동을 벗어난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사진 촬영에 관대하지 않았다. 같은 아프리카라도 중동에 포함되는 이집트나 수단에서는 서로 사진을 찍어보라고 난리였는데 여기서는 사진을 찍지 말라는 얘기를 가끔 듣는 편이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이곳 시골의 몇몇 아이들은 사진을 찍어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집들이 보였다. 사람들은 수줍게 인사를 건네거나 신기하게 쳐다봤다. 더 이상 나에겐 호수를 보는 것 따윈 그리 중요치 않았다. 깊은 산속을 향해 걸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사람을 만나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항상 아이들은 멀리서 우리를 발견하고 뛰어와 인사를 했다. 어떤 아이는 옷을 입지 않은 것과 다름 없는 차림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보다보다가 드문드문 있는 마을을 연결해 주고 있었다.


구름을 담은 것처럼 경계가 모호한 호수가 눈앞에 등장하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호수 가장 자리에는 거대한 나무가 우뚝 솟아 있어 신비감을 더했다.


아주 작은 마을이 보였다. 우리가 걷는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봤던 아이의 가족이 운영하는 슈퍼가 있어 이곳에서 맥주를 한 병씩 사서 마셨다. 물론 냉장고는 없어 미지근했다. 캐나다인은 어디서 샀는지 사탕수수를 씹어 먹고 있었다. 우리끼리 떠들다가 여기 아이들과 우연히 사진을 같이 찍게 되었는데, 무겁다는 이유로 포토프린터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게 떠올랐다. 사진을 선물해 주면 정말 좋아 할 텐데, 무척 아쉬웠다.


호수를 따라 계속 걷자 그 끝에는 매우 고급스러워 보이는 리조트가 있었다. 주변에 있는 집들과 비교해 너무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카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는 서양인들이 여럿 있었다.


조쉬는 곧장 수영장으로 뛰어 들었지만 나와 캐나다인 여행자는 해가 지기 전에 떠나는 게 좋아 보였다. 결국 두 명의 미국인을 두고 우리는 보다보다를 타고 마을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40분이 걸릴 정도로 정말 멀었다. 게다가 비포장도로라 어찌나 먼지가 많던지 도착하자마자 물티슈로 얼굴을 닦았는데 짙은 갈색으로 순식간에 변했다.


우리는 에피타이저로 꼬치를 몇 개 집어 먹고는 저녁을 먹으러 갔다. 캐나다인이지만 사실 홍콩에서 태어난 중국계였던 이 친구는 한국 사람과 이렇게 얘기하는 게 처음이라고 했다. 내가 한국인 여행자는 어딜 가도 만날 수 있지 않냐고 약간의 의문을 표시했지만 그녀는 가끔 만나긴 했지만 대부분 너무 조용하거나 다른 여행자와 어울리지 않았다고 했다. 나름 너하고는 말도 잘 통한다는 그런 칭찬이기는 한데, 괜찮은 한국인 여행자를 못 봤다는 소리로도 들렸다.


다음날은 숙소에서 그냥 쉬기만 했다. 숙소가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걸어가 점심을 먹은 뒤 보다보다를 타고 돌아온 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저녁에는 자려고 누웠는데 조쉬가 내 방 문을 두드렸다. 식당에서 만난 스위스인들과 술 마시러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 반, 망설일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지만 겨우 5초간 망설인 후 나갔다. 우리는 우간다 현지인들이 가득한 시끄러운 술집에서 정신 없이 이야기를 했다. 특이하게도 스위스 친구들이 맥주를 계속 사줬다. 조쉬도 마찬가지였지만, 10일 일정으로 우간다를 여행하고 있는 스위스인 제이콥과  토비는 1년 넘게 여행한 나를 보며 무척 놀라워했다. 우리는 술집을 옮겨 다니며 새벽 2시까지 마셨고, 다음날 아침에는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헛된 다짐을 했다.


포트포털은 나름 괜찮았다. 사실 숙소에서 늘어져 지내느라 구석구석 돌아다닌 것은 아니지만 먹거리도 쌌고, 사람들도 나쁘지 않았다. 포트포털에서 4일간 지낸 후 카벨리(Kabele)로 이동하는 버스를 예약했다. 버스 회사는 칼리타(Kalita)와 링크(Link) 두 군데가 있었는데 둘 다 출발 시간이 오후 6시였다. 그건 카벨리에 새벽에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숙소에서 자신을 ‘알리바바’라 불러달라고 하는 영국인 아저씨(45년생이니 어쩌면 할아버지)를 만났다. 오로지 캠핑으로만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해서 무척 흥미로웠다. 태국,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 숙소는 절대 가지 않고 오로지 캠핑으로만 6개월 여행했다고 했고, 현재 영국에서 살고 있는 곳도 트럭을 개조한 집이라고 보기엔 너무 낭만적인 곳이었다. 역시 여행을 하는데 있어 나이는 중요치 않은 것 같다. 혹은 여행을 하면 몸도 마음도 젊어진다는 게 진리가 아닐까.


다음날 카벨리로 향하는 버스를 타러 시내로 간 뒤 남는 시간 동안 차를 마시고, 소고기와 염소고기 꼬치를 먹었다. 그것도 모자라 ‘롤렉스’라고 부르는 짜파티를 사서 저녁으로 먹었다. 버스는 역시 기대도 안 했지만 6시가 아닌 8시가 되어 출발했다. 사실 우리 입장에서는 더 늦게 출발하기를 바랐는데 그 이유로는 카발리에 도착했을 때가 무려 새벽 3시 반이었기 때문이다. 어두컴컴한 그것도 국경 부근의 도시에 새벽에 도착하는 건 그리 마음에 놓이지 않는 법이다. 다행히 내리자마자 보다보다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고, 새벽 4시에 체크인을 한 뒤 잠이 들었다.


카벨리(외국인들은 카벨레로 불렀지만 현지인들은 카벨리로 부른다)의 풍경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도로를 포장하기 전이라 온통 먼지로 가득했다. 마을이 그리 큰 것도 아니라 잠깐 걷다가 돌아왔다.


배낭여행자에게 가장 좋은 곳은 역시 허름한 식당이다. 패스트푸드점에서 가격을 보고 놀라 나온 뒤 내가 간 곳은 탁자만 하나 놓인 작은 식당이었다. 4000실링(약 1500원)에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어 여기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도 이곳을 찾았다.


카벨리는 다른 국경 마을보다는 나은 편이었으나 오래 머물기 괜찮은 도시는 아니었다. 사실 카벨리를 온 것은 국경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아름답기로 소문난 부뇨니 호수(Lake Bunyonyi)를 가기 위해서였다. 카벨리에서 약 10km 떨어져 있어 보다보다를 타고 호수로 갔다. 호수 부근에 숙소가 많았지만 우리는 호수 중심부에 있는 이탐비라 섬(Itambira Island)을 가기로 했다. 그곳에는 론리플래닛에서 추천한 숙소, 부유나 아마가라 롯지(Byoona Amagara Lodge)가 있는데 갈 때는 카누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스피드보트와 어떤 차이가 있나, 왜 비싼가 궁금했는데 카누를 보고서 알게 되었다. 물론 뒤에 있던 친구가 대부분 노를 저었지만 카누는 무려 1시간 동안 노를 저어 호수를 건너야 했다.


뒤에서 노를 저어 주던 친구는 이 호수의 깊이가 무려 900미터라는 놀라운 말을 했지만, 우리는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나중에 만난 다른 외국인 여행자도 900미터는 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1시간 동안 노를 저어 힘들게 섬에 도착했다. 노를 저어준 친구는 섬에서 나올 때 꼭 자신에게 연락하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그래야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섬에 도착한 후 첸은 도미토리에 체크인을 하고, 나는 텐트를 쳤다. 그리고는 식당에 앉아 주변 경치를 바라봤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마구 멋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분명 처음에는 기대치에 못 미쳤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점점 괜찮아졌다.


사실 섬에서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조금 더 움직이고 싶다면 카누를 빌려 다른 섬을 가는 것도 가능하나 대게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게 전부다. 게다가 태양열 발전으로만 섬의 전기로 충당하기 때문에 저녁을 먹고 바로 자야 했다. 다만 텐트에 들어가자마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일어났다. 호수의 분위기는 이전보다 훨씬 좋았다. 아름다웠다. 가만히 앉아서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니 몇 년 전에 여행한 인도네시아의 또바 호수가 생각났다. 첸은 우간다가 동남아시아의 어느 나라 같다고 했는데, 나도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나저나 호수의 나라답게 우간다에서 호수를 참 많이 본다.


부뇨니 호수는 ‘작은 새들의 호수’라는 뜻이다. 첫째 날에는 이유를 몰랐으나 아침이 되자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리고, 내가 앉아 있는 곳 바로 옆까지 새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작은 새들의 호수’라는 것을 실감하게 됐다.


새들이 탁자 위에 올라가 남은 빵을 먹을 정도니, 말 다했다.


다른 섬으로 가보거나, 산을 오르는 트레킹은 전혀 할 생각이 없었고, 그저 가볍게 섬을 걸어봤다. 워낙 작은 섬이라 산책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지만 우리가 있는 숙소 말고도 다른 리조트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콘크리트로 지었다고 열심히 자랑을 하기는 했는데 새로 지어서 그런지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지난밤 폭우에도 내 텐트는 무사했다. 오후 들어 해가 쨍쨍해 비가 온 흔적은 어디에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기 전부터 다시 폭우가 쏟아졌다. 전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렸을 뿐만 아니라 번개도 수시로 쳤다. 아무리 작은 텐트라도 쉽게 무너지진 않지만(당연히 비싸게 산 건데!), 비가 많이 와도 너무 많이 와 걱정이 됐다. 텐트는 전혀 문제 없었지만 그칠 줄 몰랐던 비는 3시간 동안이나 이어졌다.


여행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여기서도 몇 명의 여행자를 만났다. 대부분 짧게 대화를 나누는 수준으로 헤어졌는데, 마지막 날에는 벨기에인 케롤린과 그녀의 오빠, 그리고 엄마를 만나 함께 했다. 케롤린은 1년 반부터 우간다에서 일하고 있었고 이번에 오빠와 엄마가 우간다로 날아와 같이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늦은 밤까지 수다를 떨다가 각자의 잠자리로 돌아갔다. 텐트로 돌아간 나는 계속해서 번쩍이던 번개, 그리고 새벽에 또 다시 쏟아진 폭우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행히 아침에 비는 그쳤지만 급하게 떠나느라 젖은 텐트를 말아 넣어야 했다. ‘작은 새들의 호수’를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운이 좋게도 케롤린네 가족이 스피드보트를 예약해 우리도 탈 수 있었다. 섬으로 들어올 때는 노를 저어 1시간이나 걸렸는데 스피드보트를 타니 단 15분 만에 육지로 나올 수 있었다.


섬에서 나온 후에도 케롤린 가족의 렌터카를 타고 카벨리까지 편하게 왔다. 케롤린 가족과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안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했고, 무려 18일간 같이 여행한 중국인 여행자 첸과도 여기서 헤어졌다. 버스 파크에서 삐끼를 만나 쉐어택시를 어렵지 않게 타게 되었고, 나는 곧장 르완다로 향했다.


이 글이 마음에 든다면 여러 방법으로 저를 응원(클릭) 할 수 있습니다. 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배낭여행자에게 커피 한 잔 사주시겠습니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