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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최대 관광지이자, 마추픽추의 도시 쿠스코(Cusco)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4시 30분이었다.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고, 너무 이른 시각이라 터미널을 나가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날이 조금 밝아지면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다 생각했다. 새벽 6시에 터미널을 나오자 바로 택시가 붙었는데 “10솔!”이라며 얼른 타라고 했다. 나는 걸어가면서 5솔이 아니면 타지 않겠다고 했다. 터미널에서 기다릴 때 어쩌다 페루 아주머니와 대화를 조금 나누게 되었는데 아르마스 광장까지 택시 요금이 5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벽이라 손님도 별로 없었으니 나를 잡아야만 했다. 몇 번 가격을 내렸지만 내가 5솔을 고집하자, 결국 5솔로 택시를 타게 되었다. 능숙하진 않지만 남미를 여행하는 동안 이미 숫자를 비롯해 기본적인 스페인어 단어를 익힌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여전히 스페인어를 못하지만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날씨는 흐리고,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아르마스 광장에 도착하니 확실히 관광지다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나는 한국인 배낭여행자가 많이 간다는 엘푸마 호스텔로 가서 체크인을 했다. 이 호스텔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명의 한국인 여행자가 오는 걸 보게 되었다. 확실히 가격이 싸고, 한국인들이 많이 오니까 유명한 것 같은데 여기서 며칠 지내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일단 주인장이 너무 불친절했다. 


쿠스코에서는 평범한 관광객이 된 것처럼 돌아다녔다. 그리고 늘어졌다. 마추픽추를 보러 쿠스코를 오지만, 사실 쿠스코 자체로도 분위기가 꽤 좋았다. 어쩌면 오랜만에 많은 관광객을 봐서 들떴는지도 모르겠다. 


대신 여행자가 많은 중심부는 물가가 비싸 무조건 외곽의 싼 식당을 찾아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확실히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저렴한 페루 현지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쉽게, 그리고 유명한 곳은 산페드로 시장이었다. 점심은 거의 매일 이곳에서 먹었다.


시장의 규모가 꽤 크다. 다른 곳에서 봤던 시장처럼 과일이나 야채를 팔고 있고, 기념품을 파는 곳도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깔끔한 식당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페루 현지의 다양한 음식을 맛 볼 수 있고, 무엇보다 아르마스 광장에 비하면 가격이 무척 싸다.

 

평소처럼 시장에서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을 보게 되었다. 좁은 공간에 겨우 앉아 후루룩 먹고 있는데 맛있어 보였다. 나도 하나 달라고 했다. 닭고기를 잘라 넣고, 커다란 냄비에서 보글보글 끓는 뽀얀 육수를 부어 주는 음식이 우리의 시장에서 볼 수 있는 국밥처럼 느껴졌다. 


남미에 와서 항상 닭고기나 소고기 요리를 먹었는데 이렇게 국물이 가득한 요리는 처음 보는 것 같다. 맛은 딱 백숙과 비슷했다. 스파게티 면이 약간 어색했지만 익숙한 한국의 맛이 느껴져 이후에도 몇 번 찾아 먹곤 했다.


볼리비아에서 자주 보였던 메추리알은 여기에도 있다.


빨리 마추픽추부터 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쿠스코에 머무는 동안 어차피 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았다. 


쿠스코에서는 한국인 여행자를 정말 많이 만났다. 하긴 남미를 여행하면서 처음으로 느꼈던 진짜 관광지다운 도시였으니까. 여기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는 대부분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었는데 그 중에는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 대학생도 여러 명 있었다. 대학생들과 10살 이상 차이가 난다니 나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오랜만에 한국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 어린 친구들이 많아 저녁을 직접 만들어 먹기로 했다. 돼지고기를 사서 제육볶을을 만들어봤는데 다행히 다들 맛있다고 난리였다.


외국인 여행자가 많아 쿠스코에도 프리워킹 투어가 있다. 프리워킹 투어는 게으른 내가 잘 모르는 도시를 쉽게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가이드와 아르마스 광장 주변을 걸으면서 잉카시대의 흔적을 찾기도 하고, 식당에 가서 알파카 고기를 맛보기도 했다.


피리처럼 보이는 관악기를 연주하거나 독특한 복장으로 여행자를 맞이하는 잉카인의 후손은 다분히 상업적이다. 그러나 가이드의 설명에도, 곳곳에서 들이대는 카메라에도 아무렇지 않게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진지했다.


그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들의 표정도 진지했다. 이곳의 아이들은 알파카 새끼를 보자기에 싸서 데리고 다녔다.


사실 내 관심은 다른데 있었다. 아주머니가 먹이를 들고 가자 뒤꽁무니를 쫓던 알파카와 야마(대부분 라마로 부르지만) 무리들이 무척 귀여웠다. 가이드는 여기서 알파카와 야마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알려줬다. 얼굴이나 귀 모양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보통 야마는 캥거루나 낙타와 비슷하게 생겼고, 알파카는 양과 비슷하다. 


사람에게 길들여져 원래 순한 동물이기도 했고, 다들 먹는데 정신이 팔려 가까이 가거나 만져도 가만히 있었다. 근데 이 녀석을 보자 빵 터졌다. 털이 너무 길어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앞이 보이는지 아니면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건지 질겅질겅 씹는데 여념이 없었다.


오랜 친구를 만난 것 마냥 어깨동무를 하며 사진을 찍었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조금 벗어나 자갈로 바닥을 깔고, 커다란 돌로 벽을 쌓은 곳을 걷게 되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이곳은 잉카시대의 석조 기술을 엿볼 수 있는 12각돌을 볼 수 있다. 12면이 있다는 게 뭐가 그렇게 신기한가 싶지만 사실 여기에 있는 모든 돌은 자연에서 가져온 그 상태 그대로 쌓은 것이다.


12각돌이 있는 주변에는 기념품 가게로 가득했다. 그 중에는 <꽃보다 청춘> 촬영팀이 왔다며 영업을 하는 곳도 있었다.


워킹투어는 식당에서 세비체를 만드는 것을 보고 직접 맛보며 마무리했다. 남미 여행을 처음 시작했던 아르헨티나부터 나는 세비체를 먹었는데 페루를 여행하는 동안에는 틈만 나면 먹었던 것 같다.


쿠스코 시내를 걷다 보면 가끔 우리를 보며 사진을 찍자는 무리를 만나게 된다. 그저 동양 여행자를 많이 만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봐서 한국인 여행자가 신기하고 반가웠던 것이었다. 그런데 너무 옛날 드라마인 <꽃보다 남자>의 주인공 근황을 물어본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할까 고민하다 나름 자신 있는 수제비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수제비는 고기가 들어가지 않아 저녁 한 끼를 먹는데 돈도 적게 들고, 자주 먹는 음식이 아니라 특별하게 느껴질 수 있다. 대신 반죽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10인분을 만드니 반죽하는데도 한참 걸렸다.


내가 반죽을 하는 동안 남은 사람들이 채소를 다듬어줬다. 냄비 하나로는 부족해 결국 냄비 하나를 더 꺼내 나눠서 끓여야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요리를 해준 적이 별로 없어서 걱정을 했는데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다들 페루에서 수제비를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며 무척 좋아했다.


잉카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이제 시끄러운 클럽 골목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늦은 시각까지 여행자들은 시끄러운 음악에 흥겨워하며 술을 마시고 놀고 있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서는 사탕이나 껌을 팔고 있는 어린 아이가 추위보다 더 힘겨웠던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고 있었다.


마추픽추를 가기 전에 먼저 여행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곳은 비니쿤카(Vinicunca)였다. 오히려 '무지개 산'으로 더 알려진 곳으로, 쿠스코를 여행하다 여유가 있을 경우 하루 당일치기로 많이 가는 편이다. 당일치기이지만 쿠스코에서 꽤 멀어 새벽 5시 30분에 출발해야 했다. 몇 시간을 달리자 날이 밝아왔고, 비니쿤카에 도착했다. 작은 개울이 흐르고 저 멀리 설산이 보이는 쿠스코와는 완전히 다른 경치였다.


쉬지 않고 풀을 뜯어먹는 알파카가 굉장히 많았다. 


간단하게 빵과 커피로 아침을 해결한 후 산을 올랐다. 현재 우리가 있는 지점이 해발 4,900미터인데 정상은 5,100미터라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약 3시간 걸리는 가벼운 산행이라고. 


올라가는 초입에 힘들어하는 여행자를 위해 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니쿤카 투어보다 더 비싼 80~100솔에 말을 탈 수 있는데 오르다 중간에 힘들어하는 것보다 아예 처음부터 말을 타는 편이 좋다.


많은 여행자들이 오로지 무지개 산을 보기 위해 걸었다. 초반에는 그리 힘들어 하는 사람도 없었고, 나 역시 예상보다 평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비니쿤카에만 무지개 산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은 칠레나 아르헨티나 북부에도 이와 비슷한 산이 많다. 다만 쿠스코는 여행자들이 많기 때문에 쉽게 올 수 있고, 그 때문에 다른 산에 비해 더 알려진 편이다. 


생각보다 여행자가 많고, 생각보다 말을 끌어주는 현지 마부가 많아 놀랐다.


그냥 산만 오르면 될 줄 알았는데 입장료를 내야 했다. 10솔로 그리 비싼편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별로 힘들지 않아 가이드 말대로 3시간이면 충분히 올라가겠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경사가 가팔랐다. 그래도 칠레 토레스델파이네에서 개고생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엄청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았고, 항상 선두권에서 걸었다. 물론 후반부에는 욕을 하며 올라가긴 했지만. 


원주민들은 말을 끌며 이 힘든 코스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빨리 오르고, 빨리 내려가야 한 명이라도 더 태울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힘든 표정을 찾을 수 없다.


대체 무지개 산은 어디에 있는 거냐며 욕이 절로 튀어 나올 때 마지막 지점인 전망대가 보였다. 정말로 정상까지 3시간 걸렸다.


훨씬 가파른 언덕이지만 이제 다 왔다고 생각하니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순식간에 정상에 도달했다.


전망대에서 뒤를 돌아보면 사진에서만 보던 여러 색깔이 층을 이루고 있는 무지개 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상 부근은 5,100m에 달하기 때문에 세찬 바람에 몸이 덜덜 떨리고, 너무 추웠다. 구름의 움직임도 무척 빨랐다.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해 해가 뜨기만 기다렸는데 해는 구름에 갇혀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도착한 우리들은 서로 사진을 찍어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우리를 발견한 가이드는 조금 이따 내려가라고 했다. 정상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다행히 내려가기 직전 구름 사이로 햇볕이 내려 나름 선명한 사진 몇 장을 더 찍을 수 있었다.


내려갈 때 머리가 조이는 듯한 고산병 증세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곳은 5,000미터가 넘는 높은 곳이다 보니 고산병 증세가 쉽게 올 수밖에 없다. 그래도 높은 지대를 여행하더라도 남들에 비해 고산병으로 고생했던 적이 거의 없었고, 비니쿤카에서도 아주 살짝 아팠을 뿐이었다. 내려가는 길에 고산병으로 무척 힘들어 하는 사람을 여럿 봤다.


나를 비롯해 몇 몇 어린 친구들이 가장 빠르게 내려가는 중이었다. 우리가 한참 내려가고 있을 때 그제야 올라오는 몇 명도 보였다. 너무 힘들어 보이고 아직 가는 길이 멀어 말을 타라고 권했는데 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중에야 전해 들었지만 정상까지 가지도 못하고 내려와야 했다. 쿠스코까지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가이드는 내려가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금방 내려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엄청 오래 걸리고 힘들었다.


다 내려왔을 즈음, 갑자기 쏟아지는 우박에 놀라 뛰었다. 다행히 우리는 금방 내려와 이어진 돌풍을 피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들어왔다. 너무 배고팠는데 다른 사람들을 기다려야 하니 점심을 주지 않았다. 1시간이 지난 후에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맛은 없었다.


쿠스코로 돌아오는 길은 멀게 느껴졌다. 짧은 등산이지만 가파른 오르막길과 고산병에 지친 사람들이 많았는지 다들 쓰러져 잤다.


오랜만에 많은 한국 사람들을 만났으니 반가운 것도 당연했고, 함께 어울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야 어디로 갈지 계획도, 대책도 없었지만 대부분은 짧은 일정이라 페루와 볼리비아, 멀리 브라질까지 이어지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마추픽추를 가기로 결정한 뒤에도 며칠 시간이 남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하루를 보냈다.


남미에서는 어느 도시를 가도 예수상이 있는 전망대가 있는 것 같다. 어딘지 친근해 보이는 예수상을 찾아 올랐고, 야경을 보기 위해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노란 불빛이 쿠스코를 밝혔다.


내가 쿠스코에 있을 때는 핼러윈 데이가 있었다. 스페인 식민시대를 겪은 남미는 대부분이 카톨릭을 믿는 터라 핼러윈이 무척 큰 행사였다. 물론 카톨릭을 믿지 않더라도 핼러윈이 특별한 날로 취급하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핼러윈을 기다리는 사람이 꽤 되니까. 아무튼 이날은 쿠스코에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걷기 힘들 정도였다.


핼러윈에 피카츄와 엘사를 보다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


해적이지만 너무 귀여워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거리에는 핼러윈을 맞아 분장을 도와주거나 상품을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괴기스러운 분장이 가끔 있긴 했지만 아이들에게 예쁜 옷과 코스튬을 하고 나온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핼러윈보다는 코스튬을 즐기는 축제처럼 느껴졌다.


쿠스코에서는 늘어지기 쉬웠다.


쿠스코까지 왔는데 마추픽추를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추픽추로 가는 방법은 크게 4가지 정도가 있었다. 잉카 시대의 길을 따라 캠핑을 하며 정글을 걷는 트레킹이 있고, 산악 자전거와 같은 여러 액티비티를 즐기면서 가는 투어, 그리고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셔틀 버스만 이용해 가는 방법이 있다. 물론 불편함과 많은 시간을 소비하더라도 직접 현지 교통을 이용해 가는 방법도 있다. 한국인 여행자들은 대부분은 산악 자전거와 짚라인 등을 즐기며 2박 3일간 마추픽추를 여행하는 투어를 선호하는 편이다. 여러 액티비티를 할 수 있는데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알아봤을 때도 그렇게 비싸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학생증까지 있다면 할인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셔틀 버스를 이용해 마추픽추로 갔다. 산악 자전거를 볼리비아에서 '데스로드'를 통해 이미 경험해 보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시간과 돈을 더 아끼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셔틀 버스(정확히 말하자면 밴)의 가격은 왕복 60솔 정도였다.


쿠스코에서 셔틀을 타고 이드로일렉뜨리까(Hidro Electrica)까지 이동한 후 걸어야 한다. 마추픽추가 있는 마을까지는 차가 다닐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인데 많은 여행자들이 걷고 있어 같이 따라가면 된다. 얼마 걷지 않았을 무렵 일본인 여행자 켄을 만나게 되었다. 혼자서 걸으면 심심한데 마침 잘 됐다고 생각했다.   


가끔 마추픽추로 가는 페루레일이 지나갔다. 배낭여행자에게는 비싸게 느껴지지만. 조금 고급스러운 여행을 하고 싶다면 이 열차를 타면 된다.


기찻길을 따라 3시간 정도 걸으면 마추픽추 아래에 있는 마을 아구아스 깔리엔떼스(Aguas Calientes)에 도착하게 된다. 아구아스 깔리엔떼스는 스페인어로 '따뜻한 물', 그러니까 온천을 뜻하는데 실제로 이 마을에는 온천이 있다.


켄과 나는 저렴한 숙소를 찾아 체크인을 한 뒤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철로를 따라 마을의 끝으로 가봤는데 구석에 있는 식당은 생각만큼 비싸지 않았다. 우리가 메뉴판을 살펴보자 피스코사워를 공짜로 준다며 얼른 들어오라고 했다.


산 속에 있어 여러모로 열악한 동네일 줄 알았는데 여행자로 가득해 분위기가 제법 괜찮았다. 


우리는 칵테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식당에 가득 찬 여행자들은 이제 마추픽추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라이브 공연을 들으며 흥겨워했다. 나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갑자기 하루 더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장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내일 모레 떠나는 일정을 변경했다. 이렇게 하면 내일 하루 종일 마추픽추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한결 여유로워진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6시에 나갔는데 버스를 타려고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한참을 걸어가 끝에서 기다리는데 버스를 타려면 마추픽추 입장권을 미리 구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켄이 내 여권과 버스표를 들고 마추픽추 입장권을 사러 갔고, 나는 줄을 섰다. 아무런 준비가 없던 우리는 여러모로 정신이 없었다.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에서 마추픽추로 올라가는 버스가 새벽 5시부터 출발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을 줄 예상 못했던 것이다. 그제야 많은 사람들이 새벽 5시부터 걷거나 버스를 탔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시간 넘게 기다린 후, 날이 완전히 밝은 후에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누군가 마추픽추를 올라갈 때는 버스를 타라고 권했던 게 기억났다. 그래서 버스를 타긴 하는데 편도 40솔(12달러)이라 결코 저렴하진 않았다. 구불구불 이어진 절벽을 따라 버스는 먼지를 내뿜으며 질주했다. 마추픽추 입구에 도착하는데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드디어 나도 마추픽추에 발도장을 찍게 되었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때는 날씨가 너무 좋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찍은 마추픽추 사진을 보니 구름이 있을 때 더 신비로워 보이는 것 같다.    


마추픽추에서 우리를 처음 맞이한 건 사람이 아니라 야마였다. 다른 곳과는 달리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치지 않았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마추픽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으로 봤던 것처럼 돌로 만든 집 터가 그대로 남아있고, 우뚝 솟은 커다란 산이 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런 높은 곳에 도시가 있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단지 사진 한 장 건지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하면 많이 아쉽다. 마추픽추 내에도 여러 구역이 있어 다 돌아보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먼저 태양의문(Intipunku)로 가봤다. 그리 멀지도 않고 가파른 오르막길은 아니었으나 켄은 무척 힘들어했다. 발을 맞춰 걷다가 지친 켄이 먼저 가라고 했다.


태양의 문을 잔뜩 기대 했던 것은 아니지만 별 거 없었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작은 터가 있을 뿐이었다. 여행자들은 이 돌계단 주변에서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절벽 아래를 잠시 내려다 보니 까마득하다. 지금도 우루밤바 계곡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데 과거에는 아예 그 존재 자체를 믿기 어려운, 아마도 전설로 내려오는 그런 도시로 여겨졌을 것이다. 실제로 산 아래에서는 마추픽추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워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로도 불린다.


우리는 다시 마추픽추가 보이는 곳으로 돌아와 다른 사람들처럼 잔디밭에서 쉬었다. 남들은 일생에 한 번 가보고 싶은 장소라고 하지만 이렇게 잔디밭에 앉아 멍하니 있으면 마추픽추가 그저 뒷산에 있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잠시 후 나는 마추픽추를 살펴 보러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켄은 지쳤다며 조금 더 쉬겠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마을에서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따로 다니기로 했다.


내려가는 도중 사람들 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고 있는 야마 두 마리를 발견했다.


대부분 이 야마를 보고 신기하고 재미있어 사진을 찍는데 여념이 없지만, 사실 야마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먹을 것'에만 관심을 보일 뿐이었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이번에는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먹고 있던 바나나를 노리고 있던 것이다. 손에 들고 있거나 가방에 들어 있는 것도 머리를 처박으며 뺏으려 했다. 


마추픽추를 누가 먼저 발견했는지는 이견이 있지만 대게 미국의 학자 히람 빙엄이 최초 발견자로 알려져 있다. 1911년 히람 빙엄은 우루밤바 계곡을 조사하는 도중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마추픽추를 찾아냈고,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지원을 받아 마추픽추를 방문해 전 세계에 공중도시를 알렸다. 결국 지금은 페루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위에서 마추픽추를 실컷 내려다 봤으니 이제 고대 도시로 들어가 살펴보기로 했다. 


200여개의 집 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대부분 돌로 쌓았는데 작은 틈도 없이 딱 맞아 떨어진다. 게다가 몇 십 톤에 달하는 무거운 돌을 어디서, 어떻게 옮겼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가이드 없이 계단을 따라 계속 걷기만 했기에 정확한 장소까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신전과 집 터를 바라봤다.


마추픽추 뒤로 산봉우리가 보였다. 마치 하늘 위에 떠있는 공중 도시처럼 느껴졌다.


끝에는 복원된 잉카시대의 집이 있다.  


다른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여 어떤 곳인가 살펴봤는데 미리 예약해야 올라갈 수 있는 와이나픽추(Huayna Picchu)로 가는 길이었다. 마추픽추를 바라볼 때 뒤에 있던 바로 그 산봉우리다.


험난해 보이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반대편에서 마추픽추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애초에 와이나픽추에 대해서도 몰랐기 때문에 예약을 하지 않았다. 잠깐 올려다 봐도 경사가 무척 심해 보여 고생길인 것 같다.


이곳에 살던 잉카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석조 건축만이 아니라 경사진 곳에 만들어진 계단식 논도 인상적이다. 이 계단식 논을 위해 만들어진 우물과 수로는 잉카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온 여행자들이 걷고 있다.


한눈에 봐도 남달라 보이는 이 건물이 '태양의 신전'이다. 해시계를 가지고 정확한 시간을 측정했다고 하는 잉카인들에게 태양은 무척 중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잉카의 흔적이 흩어져 있는 페루와 볼리비아에서 태양을 숭배하는 유적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 태양의 신전은 커다란 돌을 깎아 만들었다.


태양의 신전 아래를 살펴보니 물이 졸졸 흐르는 작은 수로가 보였다. 마추픽추가 놀라운 또 하나의 이유는 비가 아무리 내려도 물이 고이지 않도록 했고, 수로를 이용해 물을 공급했다고 한다.


아구아스깔리엔떼스에서 하루 더 머물기를 잘 한 것 같다. 1박 2일 일정으로 온 여행자의 경우 2시까지 이드로일렉뜨리까로 가야 하는데 나는 하루 종일, 마추픽추가 질릴 때까지 볼 수 있었다.


야마와 셀카를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마추픽추를 충분히 눈에 담았다 생각했지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려올 때는 버스를 타지 않고 걸었다. 마침 마추픽추 입구에서 켄과 다시 만나 같이 내려가게 되었는데 다리가 안 좋은 것인지, 아니면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인지 무척 힘들어 했다. 켄은 어떻게 그렇게 잘 걷냐고 물었지만 사실 그렇게 힘든 코스가 아니었다. 결국 켄은 내려와서도 다리가 불편했는지 절뚝거렸고, 다음날 이드로일렉뜨리까까지 걷지 않고 무지하게 비싼 열차를 타고 돌아갔다.


마을로 돌아와 우리는 숙소를 찾아 다녔다. 다행히 두 명이라 저렴한 더블룸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켄은 피곤했는지 침대에 뻗어 자고, 나는 마을을 한 바퀴 둘러봤다.


볼거리는 별로 없지만 골목을 따라 이곳저곳 걷다 보면 싸고 괜찮아 보이는 식당을 발견하기도 하고,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축구장에는 잔디가 깔려 있어 꽤 괜찮아 보였다.


다음날 아침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이드로일렉뜨리를 향해 걸었다. 가는 도중 쿠스코에서 만났던 한국인 동생 몇 명을 만나게 되었다. 이드로일렉뜨리까에서 쿠스코로 돌아오는 길은 정말 멀고도 험했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달리느라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쿠스코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였다. 너무 피곤하고 추웠지만 오늘 잘 곳이 없어 숙소부터 찾아다녔다. 급한 대로 딱 몸만 누울 수 있는 작은 싱글룸을 찾아 체크인했다.


피곤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줄 알았는데 쿠스코로 돌아온 기념으로 함께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이날 우리는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시며 놀았다.


쿠스코에 처음 온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이곳에서 참 오래 지냈다. 이미 마추픽추까지 다녀왔으니 더 이상 오래 있을 이유는 없었다. 물론 쿠스코 근교에 있는 소금광산이나 모라이를 갈 수도 있었는데 그냥 모든 게 귀찮아졌다.


마침 며칠 동안 함께 지냈던 동생들도 볼리비아로 간다고 하니, 나 역시 떠나기로 결심했다. 다음 목적지는 아레키파(Arequipa)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