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남미를 여행하다 보면 야간 버스를 타게 되는 경우가 참 많다. 간혹 남미가 얼마나 거대한 대륙인지 잊고 여행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나라가 우리보다 크니 도시 간 이동하는데 보통 반나절은 기본이다. 리마를 떠나 북쪽으로 이동하겠다고 결심을 했을 때도 역시 야간 버스를 타게 됐다. 페루의 중앙에 있는 리마에서 에콰도르까지 한 번에 올라가기는 어려웠으니 자연스레 트루히요(Trujillo)를 거치게 되었다. 에콰도르까지 같은 루트라 리마에서 만났던 충희와 함께하게 되었다. 


사막 한 가운데서 버스가 고장나도 그러려니 해야 한다. 오래 전 라오스를 여행했을 때 버스에서 불이 나서 뛰쳐나갔던 순간이 떠올랐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런 긴박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저 언제 고쳐질지 모를 버스 주변을 서성이며 시간을 보냈다. 예정된 시간보다 2시간 정도 후에 트루히요에 도착했다.


어쨌든 트루히요에 도착했으니 숙소를 찾아 돌아다녔다. 보통 광장 주변에 숙소가 몰려있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광장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있을 때 어느 아저씨가 싸구려 숙소를 소개해주겠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가봤는데 간판도 없는 이상한 건물 내부에 정말 배낭여행자를 위한 싸구려 숙소가 있었다. 


숙소는 허름했지만 그동안 배낭여행을 하면서 워낙 이상한 숙소를 많이 봐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트루히요에서는 하루만 지낼 계획이었으니. 도미토리에는 침대 6개가 놓여져 있었는데 이곳에서 지내고 있는 다른 여행자 2명도 있었다. 키가 아주 컸던 여자 2명은 독일에서 왔다고 했는데 18살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배낭을 메고 떠나는 젊음이 부럽다. 


이 숙소에 독일인 2명이 없었으면 여행자 숙소로 생각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남미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장면 중 하나가 도로에서 빨간불이 들어오는 짧은 찰나에 묘기를 하며 돈을 받는 히피들이었는데 여기에는 그런 히피들로 보이는 몇 명이 투숙하고 있었다.


히피들은 옥상 위에서 텐트를 치고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일단 무사히 도착해서 짐을 풀었으니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골목 깊숙한 곳에 있는 이름 모를 식당에 갔는데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사람들이 꽤 많았다. 제육덮밥과 비슷한 점심을 먹고, 맥주도 마시니 조금 살 것 같았다. 


트루히요는 페루 북부에 1,100년 동안 존재했다고 하는 치무왕국의 도시인 찬찬고고유적지대(Chan Chan)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트루히요 주변에 흩어져 있는 유적지를 쉽게 돌아보려면 아무래도 투어가 적당할 것 같았다. 보통 찬찬 투어는 아침 일찍 출발하니 광장 근처에 있는 여행사에서 다음날 출발하는 것을 알아보고 오늘은 트루히요를 가볍게 돌아보기로 했다.


트루히요 역시 도시의 중심부에는 어김없이 아르마스 광장이 있다. 작은 조각상과 분수가 있었지만 여태 지나온 다른 도시에 비해 규모가 크거나 화려하진 않았다. 1820년, 이 광장에서는 토레타글레 후작이 스페인으로부터의 트루히요의 독립을 선언했다고 한다.


광장 주변에는 17세기 시대의 건축물이 여전히 남아있다.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짙은 노란색의 성당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성당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물론 이제는 성당을 하도 많이 봐서 크게 아쉬울 것도 없었지만. 


발이 내키는 대로 걸어 다녔다. 다른 도시에 비해 관광객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동네 자체는 크게 볼거리가 없었다. 우리는 시장에 들어가 한 바퀴 돌아본 후 과일 주스를 한 잔씩 마셨다.


밤거리 역시 특별하진 않았다. 북쪽으로 올라와서인지 약간 쌀쌀함을 느꼈다.


낯선 곳에서 반겨주는 사람들이 있어 즐겁다.


날이 맑아서인지 아르마스 광장은 원색의 건물과 어우러져 좀 더 산뜻하게 느껴졌다.  


투어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돼 곳곳에 있는 외국인 여행자를 태우고는 외곽에 있는 메마른 땅으로 데려다 줬다. 첫 번째 장소는 페루 북부에 독립적인 왕국인 모체 문명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와카데라루나(La Huaca de la Luna)였다. 해석하자면 '달의 신전'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유적지를 가기 전에 박물관부터 갔다. 나랑 충희는 굳이 박물관에 들어갈 정도로 흥미를 느끼지 않았고, 입장료는 별도라고 해서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장기 여행을 하다 보면 꼭 봐야 할 것이 아니라 생각되면 선택적으로 보게 되는 것 같다.


꽤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박물관에서 나온 여행자들과 합류하게 됐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와카데라루나로 들어가 관람을 시작했다. 


내부로 들어가면 독특한 무늬의 벽돌을 확인할 수 있다.


단순한 무늬를 넘어 독특한 형태의 그림도 볼 수 있었다. 모체 문명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림이 외계인이나 도깨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근까지 복원하고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실제로 와카데라루나는 계속해서 발굴, 2017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고 한다. 거의 사막과 다름 없는 건조한 지역인데 다행히 유적지에는 지붕이 있어 관람하는데 그리 힘들지 않았다.


모체왕국은 잉카제국과는 별개로 기원전 1,000년부터 기원후 600년까지 페루 북서부에서 융성했던 문명이다. 과거에는 얼마나 번성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페루에 지역마다 여러 문명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와카데라루나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벽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언뜻 봐도 거대한 규모였다. 


가까이 다가서니 모체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부조가 있다.


페루에서 여러 유적지를 가봤지만 대부분 덩그러니 흙벽돌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는 그림이나 무늬가 그대로 남아있어 나름 흥미로웠다. 원래는 치무왕국의 찬찬고고유적지를 볼 생각으로 투어를 시작했지만 트루히요에 존재했던 또 다른 문명인 모체왕국을 알게 되어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와카데라루나 관람을 마친 후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이동했다. 페루에서는 세비체를 즐겨 먹곤 했는데 이날도 세비체로 점심을 해결했다. 


찬찬고고유적지는 모체왕국과는 다른 치무왕국의 유적지다. 치무왕국은 900년부터 1790년대까지 페루 북서부에 존재했다고 하는데 잉카에 의해 멸망했고, 다들 알겠지만 잉카는 스페인에게 정복되어 사라졌다. 찬찬은 페루 북서부의 고대어로 태양이라는 뜻이다. 


가장 먼저 마을 한복판에 있는 와카델드래곤(Huaca del Dragón)이라는 유적지를 갔다. 복원을 했는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고, 벽에는 다양한 형태의 부조를 확인할 수 있다.


단순화하게 표현한 무늬가 인상적이다.


다시 이동해 이번엔 거대한 규모의 찬찬 유적지로 이동했다. 리마에서 봤던 파차카막과 마찬가지로 메마른 지역에 위치한 이 문명은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약탈로 많은 유물이 사라진 상태고, 페루 정부도 보존과 복원에 관심이 부족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다람쥐 무늬일까? 아니면 다른 동물을 의미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유적지를 돌아보면 물고기 무늬의 부조도 발견할 수 있다.


찬찬 유적지는 규모가 꽤 큰 편이었다. 찬찬을 통해 치무왕국의 도시 구역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흙벽돌만 보여 관람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가장 독특한 구역으로 느껴졌던 이곳은 닉안(Nik An)이라고 불리며 과거 찬찬인들이 중시했던 물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찬찬 유적지를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이동했던 곳은 완차코(Huanchaco)였다.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트루히요보다 더 유명한데 화려하지 않지만 나름 휴양지 분위기가 느껴지고, 파도가 적당해 서핑을 즐기기 좋기 때문이다. 만났던 한국 사람들에게 듣기로는 '초보 서퍼들의 천국'이라는 재미있는 별명도 있다고 한다. 


늦은 오후라서 그런지 서핑을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신 갈대로 만든 보트(Caballitos de totora)와 여행자가 실제로 타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완차코에는 거대한 늪지대가 있어 갈대를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약 3,000년 전부터 갈대를 이용해 배를 만들고 낚시를 했다고 한다. 아직도 이 지역에서는 갈대로 만든 배를 타고 낚시를 한다고 한다.


딱 30분이라는 짧은 시간만 주어져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는 어려웠다. 보통이라면 완차코로 이동해 며칠 지낼 법도 하지만 우리는 투어로 왔기 때문에 다시 트루히요로 돌아가야 했다.


투어를 마치고 트루히요로 돌아온 후 야간 버스를 타고 만코라(Mancora)로 향했다. 사실 만코라로 가기 전에 고민을 엄청 했다. 또 다른 유적지 쿠엘랍(Kuelap)을 보고 싶었기 때문인데 문제는 그렇게 할 경우 최소 3~4일의 시간을 페루에서 더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미 페루에서 한 달 이상 시간을 보낸 나는 조금 더 빨리 이동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졌다. 결국 시간과 돈을 절약하기 위해 야간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이동했다. 에콰도르로 가기 전 한 군데 더 들릴 수 있었는데 그곳이 만코라였다.


만코라에는 새벽에 이른 새벽에 도착했다. 해변가라 그런지 곳곳에 숙소가 있었는데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아무리 아침이지만 내가 상상했던 휴양지 느낌이 아니었고, 여행자도 별로 없어 보였다. 숙소를 찾아 한참 걷다가 술에 잔뜩 노르웨이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여자친구는 숙소에서 자고 있는데 자신은 밤새 술 마시고 놀다 들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어떻게 봐도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이른 새벽, 아무도 없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우리가 반가웠는지 아니면 말이 잘 통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몇 분간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 아침부터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한다. 일단 우리는 숙소부터 찾아야 하니 짐을 풀게 되면 연락을 주겠다고 헤어졌다. 정말 유쾌한 친구였다.


숙소를 찾아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원하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 추천해줬던 숙소 위치도 정확히 어딘지 몰라 걷다가 결국 도착하기 전에 인터넷으로 봤던 로키델마르로 가보기로 했다. 볼리비아 라파스에서 지냈던 로키 호스텔과 이름이 같은 체인으로 외국인 여행자를 대상으로 하는 파티형 호스텔이었다.


숙소 찾는 것도 지쳐서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어느 리조트에 온 것처럼 느껴졌을 정도로 시설이 너무 좋아 깜짝 놀랐다. 우리가 사용하는 방만 도미토리였을 뿐이지 밖에는 잔디가 깔린 넓은 공간과 수영장이 있고, 식당과 바가 있어 언제나 먹고 마실 수 있었다. 사실 다른 허름한 숙소의 트윈베드룸도 비슷한 가격으로 가능했지만 여기가 더 마음에 들었다. 일단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았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아까 길에서 만났던 노르웨이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우리는 어쩌다 아침부터 맥주와 데낄라를 마시게 되었는지. 그래도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와 한참 동안 수다를 떨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냈다. 한 시간 후 더 마셔도 끄덕 없다고 장담하던 노르웨이 친구가 진득하게 취해 숙소로 돌아갔다.


만코라는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훨씬 조용한 분위기였다. 어느 유명한 휴양도시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동네는 한적함이 넘쳐 흐른다. 


골목에는 독특한 차림의 히피가 많은 것을 보니 어쩌면 히피들의 휴양지가 아닌가 싶다. 


점심은 호스텔로 돌아와 해결했다. 밖에서 먹는 것보다 조금 더 비싼 편이지만 나쁘지 않은 편이다. 파티 호스텔이라 그런지 여기서 투숙하는 여행자들 역시 밖에 나가기 보다는 주로 안에서 먹고 즐긴다. 밖은 한적한데 호스텔 안은 늘 북적인다.

 

낡은 건물과 촌스러움이 묻어 있는 거리를 걸었다. 대낮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해변과 가까운 거리도 날씨가 더워서인지 텅텅 비어있다.


해변을 따라 계속 걸어봤다. 특별한 풍경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곰치처럼 보이는 죽은 물고기가 파도에 밀려 해변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해변을 걷다 이 물고기를 여럿 봤다.


페루 북부에서 나름 유명한 해변가라고 해서 며칠 지내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굳이 오래 지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곧장 에콰도르로 가는 버스편을 알아봤다. 에콰도르의 첫 번째 도시로 정한 쿠엔카(Cuenca)까지는 약 8시간 걸린다고 하는데 밤 11시 30분에 출발하는 야간 버스를 타는 게 가장 합리적일 것 같았다. 가격도 저렴하고 쿠엔카에는 아침에 도착해 여행을 이어가기 더 쉬워 보였다.


호스텔 반대 방향으로 걷다 보면 조금 더 현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해가 떨어지는 순간은 고요하다.


외국인 여행자가 몰려 있는 거리를 조금만 벗어나도 저렴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저녁으로 해산물이 듬뿍 들어간 스프와 메인으로 나온 치킨은 풍성해 무척 만족하며 먹었다. 무엇보다도 10솔이라는 가격이 마음에 들었다.


밤이 되면 해변 근처에 있는 술집은 서로 경쟁하듯 시끄러운 음악을 튼다. 그런데 신이 나야 할 가게는 텅 비어 있었고, 알록달록하고 조명과 시끄러운 분위기는 촌스러움을 연출했다. 밤에는 좀 더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야외 테이블에 앉아 칵테일 한 잔 마시는 동안에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호스텔 내부의 분위기는 축제였다. 파티 호스텔이라 짐작은 했지만 바에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음악과 술에 취해 흥겨운 분위기가 늦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바깥 해변과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트루히요에서 만났던 외국인 친구와 우연히 다시 만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날은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너무 많이 돌아다녔는지 자정이 되자 급격하게 피곤해졌다.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뻗어버렸다. 


페루에서는 길거리에서 먹었던 세비체가 더 맛있었던 경우가 많다. 날 생선이라 뜨거운 날씨가 염려되기도 하지만 눈으로 보는 위생만 괜찮다면 크게 문제는 없을 거라며 자주 먹곤 했다. 보통 길거리에서 파는 세비체는 선선한 오전에만 볼 수 있다. 


식당에서 먹었던 세비체보다 훨씬 맛있었다.


에콰도르로 가는 버스를 타기까지 시간은 한참 남아 호스텔 수영장에서 놀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며 남은 돈으로 기념품을 샀다. 점심에는 호스텔에서 무제한 바베큐 파티가 있었는데 딱히 맛있지는 않았다.


아무튼 페루에서 참 오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