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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콰도르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다윈에게 진화론의 영감을 줬던 단연 갈라파고스 섬이다. 그렇지만 갈라파고스는 늘 예산 압박에 시달리는 장기 여행자에게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여행지다. 무조건 비행기를 타야 했고, 들어가자마자 내야 하는 입도비, 비싼 물가는 '나중에'라는 말로 접어야 했다. 콜롬비아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에 빠르게 지나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에콰도르의 첫 번째 도시는 쿠엔카(Cuenca)였다. 이른 아침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서 체크인을 한 뒤 야간 이동의 피로를 풀기 위해 잠시 쉬었다. 에콰도르는 짐바브웨 이후 오랜만에 달러를 쓰는 나라였다. ATM에서 돈을 인출하자 미국 달러가 나왔다.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적당히 저렴한 식당이 있는지 찾으며 걸었는데 그리 어렵지 않게 '메뉴델디아(Menu del Dia)'라고 쓰여있는 식당을 발견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오늘의 메뉴라고 해야 할까? 남미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메뉴로 수프, 메인, 음료 등이 나오면서 저렴함이 특징이다. 이날도 에콰도르에서 처음 먹은 메뉴델디아 메뉴는 3달러였다.

 

스페인 식민시대의 오래된 건물이 많긴 했지만 동네는 깔끔한 편이었다.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지 쿠엔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처음 도착한 도시에서 적응하는 방법은 무작정 걷는 것이다.

 

조금 걷다 보니 강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작은 개울이 나왔다. 이 개울을 사이에 두고 도시가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다.

 

맑은 날씨에 걸으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알록달록한 벽화를 구경하고, 길거리에서 파는 불량식품 같은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었다. 

 

누군가는 에콰도르에서 쿠엔카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하는데 기대할 만큼 특별하진 않았다. 지나고 생각해 보면 매연 가득한 키토나 범죄율이 높다고 알려진 과야킬에 비하면 쿠엔카는 훨씬 괜찮은 동네임에 틀림없다.

 

쿠엔카에서는 손으로 직접 만드는 파나마 모자가 유명하다고 한다. 에콰도르에서 만든 모자인데 중미에 있는 나라 이름이 붙은 이유는 파나마를 통해 여러 나라로 수출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자도 관심이 없었고, 모자를 사더라도 들고 다닐 자신도 없었다. 아무튼 목적지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도시를 한 바퀴 돌게 되었다. 

 

어느 건물 안에는 재래시장이 있었다. 페루, 볼리비아와는 조금 다른 인디오들의 외모와 옷차림이 눈에 띄었다. 과거 잉카제국의 영향에 있었던 이곳은 스페인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거의 다 사라진 상태지만, 인디오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광장을 지나면 쿠엔카를 대표하는 새로운 성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서 봐도 푸른색의 돔이 인상적이다. 

 

성당 주변에는 꽃을 파는 노점이 여럿 있었다.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아마 여기서 성당 안 여러 성인 앞에는 여기서 산 꽃이 놓여 있을 것이다.

 

쿠엔카의 밤은 꽤나 조용했다.

 

아무리 작은 도시라도 보통 이틀 이상 머무는 편인데 북쪽으로 빠르게 올라가기로 했다 보니, 바로 다음날 아침에 바뇨스(Baños)로 이동했다. 바뇨스로 가는 버스는 아침에 한 대 뿐이었지만 사실 매 시간 있었던 암바토(Ambato)로 가는 버스를 탄 후 바뇨스로 가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바뇨스로 가는 여정은 굉장히 지루했다. 좁은 버스는 그렇다 쳐도 중간에 사람을 태우기 위해 수시로 정차했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낮에 타는 장거리 버스라서 그런 듯하다.

 

거의 9시간 만에 바뇨스에 도착했다. 바뇨스는 작은 동네지만 여행자로 항상 북적이는 곳이다. 

 

미리 만나기로 했던 사람들과 예약했던 숙소를 찾아가 체크인하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잠깐 걸었을 뿐인데 한국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 사실 남미에서 한국인 여행자를 만나기란 그리 어렵지 않지만 에콰도르, 그것도 바뇨스에 이렇게 한국 사람이 많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숙소를 찾아 걷다 우연히 발견했던 허름한 식당이 생각나 무작정 찾아갔다. 연기로 가득했던 허름한 식당에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곱창을 팔고 있었다. 페루에서 만났던 어느 한국인 여행자가 바뇨스에서 먹었던 곱창이 그렇게 맛있다고 칭찬을 했었는데 첫날에 우연히 찾아온 것이다. 때마침 곱창을 먹으려고 기다리던 한국인 여행자 4명과 합석하게 되었다. 우리는 통성명도 하지 않은 채 수다를 떨고, 맥주와 곱창을 해치웠다.

 

바뇨스에서는 칠레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던 동빈이와 다시 만났다. 동빈이와 날짜를 맞춘 것도 있지만 바뇨스에 한국 사람이 많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공기 좋은 곳에 위치한 이 작은 마을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액티비티가 매력적이다.

 

동빈이와 함께 만나게 된 한국인들과 다음날 곧장 래프팅을 하러 갔다. 확실히 18달러면 괜찮은 가격인 것 같다. 물론 여럿이라 약간 할인이 되긴 했지만.

 

래프팅에 앞서 구명조끼를 입고 노를 챙긴 뒤 간단한 교육을 받았다. 

 

물을 무서워하지만 일단 신난다.

 

래프팅을 처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뇨스에 도착하기 전에 이곳 물살이 험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날씨도 흐려서 살짝 걱정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거칠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만 더 빨랐으면 더 재미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다. 

 

물살이 약한 곳에서는 가이드의 의도 혹은 자신의 의지로 한 번씩 물에 빠진다.

 

두 팀으로 나뉘어서 탔기 때문에 경쟁하면서 노를 젓거나 물싸움을 하는 건 기본이었다.

 

간혹 무자비한 사람들로 인해 강제로 물에 빠지기도 한다. 구명조끼를 입었지만 물살이 빠른 지점 전에 보트로 돌아와야 한다.

 

보통 노를 천천히 젓다가 물살이 세지는 지점에서 노를 힘껏 저으며 빠져나간다. 바위가 있는 지역은 특히 위험할 수 있다. 

 

조금 더 스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우린 충분히 즐거웠다.

 

계속해서 물싸움을 하면서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하류에 다다랐다. 이제는 물에 빠져도 허리까지 밖에 오지 않는다.

 

오랜만에 계곡에서 래프팅을 하니 정말 재미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한국 여행자를 한 번에 많이 만났던 적은 손에 꼽는데 유독 남미만큼은 달랐다. 그렇다고 남미 여행지마다 한국 사람을 만났던 것도 아니었다. 관광지나 큰 도시에서만 한국인을 만나기 쉬웠다고 해야 할까. 바뇨스라는 작은 동네에 이렇게 많은 한국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며칠 뒤 더 많은 한국 사람이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동빈이를 제외하고 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같이 술을 마시며 어울렸다. 

 

남미에서 거기에 한국 사람들끼리 어울린다는 이유로 술자리가 금방 끝날 리 없었다. 처음에는 맥주를 마시다 금방 병을 비우자 보드카로 종목을 바꿔 마시기 시작했다. 한참을 마시다 보니 하나 둘 숙소로 들어갔고, 뭔가 아쉬웠던 나를 포함한 네 명은 다른 장소로 옮기기로 했다.

 

알록달록한 조명 아래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거리를 걷다 보면 확실히 세련된 맛은 아니었다. 촌스러움을 가득했던 만코라와 비슷했다. 아무래도 바뇨스는 작은 동네였으니까. 아무튼 '프리드링크'를 준다는 클럽에 들어갔다가 무지하게 쓴 술을 마시고는 바로 나왔다. 너무 시끄러웠다. 맞은편에 있는 다른 술집에서도 프리드링크를 주길래 들어갔는데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프리드링크로 준 술은 빨강색, 노란색, 초록색이 층을 이룬 예쁜 칵테일이었는데 재미있게도 잔에 불이 붙어서 나왔다.

 

이번에도 프리드링크만 마시고 나갈 수는 없어 남미에서 자주 마셨던 브라질 칵테일 카이피리니야를 달라고 했다. 밖은 여전히 시끌벅적하고, 자정을 넘어서까지 술을 마시던 우리는 끝내 취하지 않았다.

 

어쩌면 사진으로 더 유명한 장소가 바뇨스에 있다.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면 까사델아르볼(La Casa del Arbol)에 갈 수 있다. 스페인어로 까사는 집이고 아르볼은 나무이니까 번역을 하자면 '나무집'정도 되겠다.

 

나무집이 유명한 이유는 바로 그네 때문이다. 언덕 위에 있는 그네를 타고 뒤에서 사진을 찍으면 마치 공중에서 묘기를 부리는 것처럼 아찔한 장면이 담겨 나온다.

 

그네를 탈 수 있는 곳은 두 군데가 있다.

 

둘 다 그네를 타면서 사진 찍기 좋지만 역시 나무집 아래 있는 그네가 더 잘 나온다. 양 옆 기둥이 없는 데다가 절벽에 가까이 있어 사진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놀이'로 보인다. 

 

실제로는 약간 경사진 언덕이라 무섭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로우앵글로 찍으면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그네처럼 보인다. 덕분에 '세상 끝의 그네'라는 별명도 있다.

 

넓은 공터에는 아담한 규모의 짚라인도 있다.

 

다만 짚라인을 타게 되면 중간 지점에서 멈추게 된다.

 

대부분 그네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지만 주변 경치도 제법 괜찮다.

 

사실 기대했던 것보단 별 게 없지만 단 돈 1달러에 오랫동안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나름 괜찮았다고 볼 수 있다.

 

그네 사진만 보고 바뇨스를 찾아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

 

사진을 충분히 찍었다고 생각했을 때 내려왔다. 돌아가는 버스가 1시간마다 있었기에 시간을 잘 맞춰야 했다.

 

디마티아스 호스텔로 숙소를 옮겼다. 여전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남미에서는 꼭 한국인 여행자들이 몰리는 숙소가 정해져 있다. 바뇨스에서도 그랬는데 다른 숙소는 텅 빈 곳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기만 한국인들로 북적였다. 우리가 묵고 있던 숙소는 더블룸이었음에도 도미토리인 이 숙소로 전부 옮겨가기로 해서 나도 오게 되었다. 비슷한 가격인데도 말이다. 물론 이곳 주방에는 조리도구가 많아 요리를 하고 함께 먹고 즐기기는 더 좋았다.

 

바뇨스에서는 액티비티를 하지 않으면 할 게 그리 많지 않다. 래프팅을 비롯해 캐녀닝, 캐노피, 번지점프 등 여러 액티비티를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하긴 했으나 여행 막바지라 생각했던 나는 절약 모드에 들어갔다. 나보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여기 번지점프는 엉성한 줄만 묶고 바로 앞에 있는 다리에서 뛰어내리기 때문에 더 스릴 있다는 말에 쫄았던 것도 있다.

 

시장은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거나 음료를 마시기 좋다.

 

페루에서만 '꾸이'를 먹는 줄 알았는데 에콰도르에서도 즐겨 먹나 보다. 통구이 된 기니피그를 보면 있던 식욕이 사라지게 된다. 흥미롭긴 하지만 굳이 먹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경험 삼아 먹어봤으면 어땠을까 싶다. 아마 옆에서 누군가 같이 먹어보자고 꼬셨으면 먹었을 텐데 혼자라서 구경만 한 것 같다. 

 

관광지답게 어딜 가도 숙소와 기념품 가게를 찾을 수 있다.

 

한 바뀌 돌아보면 소박한 동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돼지껍데기에 흥미를 느껴 먹어봤는데 그냥 고무를 씹는 느낌이었다.

 

저녁에는 폭포 바로 아래 있는 야외 온천에 갔다. 입장료는 3달러였는데 동네 온천이니 특별할 건 없었고, 냉탕과 온탕 그리고 수영장이 있었다. 저녁에는 다 여기로 오는 것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온천을 즐기고 있었다. 시설이 좋다거나 온천에 대한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고 따뜻한 물에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오는 것으로 만족했다.

 

여행 811일 차, 노트북과 휴대폰이 박살 났다. 이를 어쩐담.

 

숙소에는 지난번 곱창 먹을 때 만났던 한국인 여행자들도 있었다. 몇 번 지나치며 인사를 했던 게 전부였는데 이날은 앉아서 계속 수다를 떨게 되었다. 나보다 형이었던 찬열이형은 대전에 연고가 있었고, 잠시 뒤에 합류했던 유경누나는 내가 2년 동안 군생활을 했던 강원도 원통 출신이라고 했다. 그 때문인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수다가 이어지게 되었다. 

 

아마도 1년 이상 여행한 장기 여행자, 그리고 비슷한 나이 또래라서 말이 잘 통했나 보다. 우리의 수다는 아침부터 밤까지 지칠 줄 몰랐다. 

 

이제는 익숙해진 바뇨스 밤거리를 걷다 술자리를 이어갔다. 여행하면서 1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수다가 이어진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수다가 즐거운 사람들을 만났는데 아쉽게도 바뇨스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아침에 배웅 나온 유경누나가 하루만 더 있으라고 했는데 키토에서 만날 친구가 있어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한 뒤 거리로 나섰다. 헤어짐은 일상이지만 또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여행의 매력이니까.